오피니언 홍승일의 시시각각

‘정치’로 일자리 만들려는 잠룡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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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홍승일 논설위원

홍승일
논설위원

미국, 아니 미국 대통령이 세긴 센 모양이다. 아니면 트럼프의 기(氣)가 워낙 센 걸까. 국경세(Border tax)라는 생소한 교역장벽을 들고 나와 유명 전자·항공기·군수 업체들을 압박하더니 급기야 글로벌 자동차 업계를 들쑤셔 항복문서를 받아냈다. GM과 포드·피아트크라이슬러·도요타·폴스크바겐처럼 콧대 높은 브랜드들이 잇따라 미국 투자를 다짐한 것이 화제가 됐다. 현대차는 트럼프 통첩을 받기도 전에 5년간 31억 달러(약 3조6000억원)를 미국 땅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해 ‘트럼프 코드’ 맞추기 대열에 동참했다.

대선 공약, 공공 일자리에 치중
눈길 끄는 ‘광주형 일자리’ 실험

문득 수백억원 정도의 기금 좀 모으겠다고 대기업 총수들을 일일이 만나는 노고를 감수한 우리 대통령이 떠올랐다. 미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인데도 ‘잘 생각해 보라’는 140자 트위터 으름장 한 방으로 내로라하는 완성차 업체 최고경영자(CEO)들을 꼼짝 못하게 했다. 고용 창출은 이제 경제·경영학뿐 아니라 정치학 교과서에도 올라야 할 주제가 되었다.

현대차의 미국행 뉴스를 누구보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 사람이 있다.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이다. 그는 광주와 전남 함평 일대 406만㎡ 면적의 빛그린국가산업단지에 자동차 생산기지와 전기차 등 친환경 자동차 클러스터 조성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 여기에 기아차를 유치해 연간 62만 대의 생산 규모를 100만 대로 늘리는 것이 최종 목표다.

기아차 모기업인 현대차가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하기로 했다.
“부럽고도 답답한 심정이다. 자국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정부끼리 전쟁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지방자치단체가 자동차 산업을 유치해 먹고살겠다고 몇 년째 발버둥치는데 (대통령 탄핵 공백으로) 우리 중앙정부가 큰 힘이 되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의 일자리 유치 방식은 분명 문제지만 그 열의는 부럽다.”
기아차도 사정이 있지 않겠는가. 뭔가 확실한 인센티브를 주지 않으면 올 리가 없다. 고임금과 전투적 노사관계, 환율리스크, 관세장벽 같은 불이익을 감수하고 굳이 한국 땅에 신규 시설투자를 하겠나.
“그래서 고안한 것이 ‘광주형 일자리’다. 평균임금을 다른 기아차 국내 사업장의 70%인 4000만원 정도로 하면 원가경쟁력이 생긴다. 별도 생산법인으로 가면 기아차의 다른 사업장과의 형평성 시비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또 광주·전남은 노사민정(勞使民政) 협력이 잘되는 지역이어서 ‘광주형 일자리’에 대한 근로자 계층의 합의가 잘될 것이다.”

배울 만한 외국 선례도 있다. 일찍이 1990년대 일본 기타큐슈 지역의 도요타 렉서스 유치, 독일 폴스크바겐의 ‘아우토 5000’ 유한회사 설립 같은 성공 사례들이다. 자동차는 전후방 연관 산업 활성화와 고용 파급효과가 큰 업종이다.

“트럼프가 오하이오주 등 미 중북부 러스트 벨트(Rust belt·생산시설이 노후화된 지역) 백인 노동자들에게 단순히 보은하려고 자동차에 눈독 들인 것은 아니다.”(신재형 광주자동차밸리추진위 부위원장)

기아차와 윤 시장의 인연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과의사 출신 광주지역 시민운동가였던 그는 외환위기 직후인 98년 지역 제조업의 40%를 점하던 기아차가 부도를 내자 회사살리기 운동의 선봉에 섰다. 국내 완성차 공장은 96년 충남 아산에 현대차가 세운 것이 마지막이다. 급기야 ‘한국산 자동차’ 생산순위는 최근 인도에 뒤져 6위로 내려앉았다.

다가올 대선의 일자리 공약이 추상적이란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지율 조사 선두를 달리는 한 후보의 경우 국민 세금이 잔뜩 들어가는 공공부문 고용 창출에 한껏 기대를 걸고 있다. 경제성장에 따른 ‘괜찮은 일자리’ 늘리기가 화두인데 대선 잠룡들의 일자리 비전에는 ‘민간’과 ‘노동개혁’ 같은 개념이 부족하다.(김성은 경희대 교수) 정치 과잉의 시대지만 일자리도 트럼프처럼 힘과 정치로 해결하려는 것 아닌지 걱정이다.

홍승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