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시로 만든 악보 54년 만에 햇빛…초연 기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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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포연 속에 홀연히 사라졌던 악보가 54년 만에 발견됐다. 청마 유치환(1908~1967)의 시에 '부산 음악계의 대부'였던 이상근(1922~2000) 전 부산대 교수가 곡을 붙인 '보병과 더불어'가 그것. 관현악 반주 형식의 혼성 합창곡으로 빠른 템포와 느리고 비장한 분위기가 교차하며 전쟁의 참혹함과 엄중함을 반복해 그려내고 있다.

작곡자 이상근은 1993년 잡지 '민족과 음악'(동아대 민족음악연구소 펴냄.제6호)에 실린 피아니스트 제갈삼(81) 전 부산대 교수와의 대담에서 "'보병과 더불어'라는 작품을 쓴 적이 있는데 아직 초연되지 않았고 악보도 분실했다"고 밝힌 바 있다.

오선지 악보 표지에는 "4285년(서기 1952년) 8월 21일"이라는 완성 일자가 펜글씨로 선명하게 씌여있다. 이 악보를 발견한 고문서 수집가 김동민(54)씨는 "1950년대의 작곡집이 아주 드문데다가 더욱이 전쟁 중에 만들어진 관현악 합창곡이기 때문에 더 희귀한 악보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상근의 제자인 작곡가 하순봉씨는"생전에 악보를 잃어버렸다고 아쉬워하던 작품을 찾아 기쁘다. 하루빨리 소리도 들어보고 꼼꼼히 연구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 곡은 청마가 51년 펴낸 시집 '보병과 더불어'에 실린 4편의 시를 골라 1~4악장의 가사로 삼았다. 청마는 당시 종군 문인으로 입대해 원산 전투 등에서 겪은 참상을 시로 표현했다. 평소 청마를 존경했던 이상근 선생이 작곡을 결심했다. 이상근 선생의 차남 이진우(58)씨는 "아버지는 유독 청마의 시를 좋아했다. 이 곡 말고도 두 분이 함께 작업한 '아가(雅歌)'란 곡이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1악장 '전진'과 4악장 '결의'는 빠른 템포며, 2악장 '전우에게'와 3악장 '1950년의 X-마스에 부치다'는 느리고 비장하다. 모두 300소절로 연주시간은 약 25분. 4분의 5박자가 등장하고 화음과 리듬이 쉽지 않은 점으로 미뤄볼 때 국군 위문공연이나 군가용이 아니라 본격적인 작품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진주에서 태어난 이상근 선생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95) 선생이 아끼던 후배다. 부산고 음악교사던 윤이상이 53년 유학준비차 서울로 가면서 후임으로 이상근을 추천했다. 이상근은 부산교대 교수를 거쳐 부산대 예술대 학장을 지냈다. 그의 대표작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이상근의 작품 전집을 준비중인 진주시 문화과의 류덕희 과장은 "당시 부산에 내려와 있던 해군정훈악대(서울시향의 전신)가 유일한 교향악단이었는데, 지휘자였던 고 김생려 선생이 '보병과 더불어'의 악보를 검토한 후 연습기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공연계획을 잡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장직.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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