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 그들은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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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산업화사회에서 근로자, 그리고 근로자 집단-그들은 누구인가』 최근 봇물터지듯 분출하는 노사분규사태는 이제껏 심각하게 제기되지 않았던 문제를 우리모두에게 일깨워 주고있다.
그동안 자기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았던 근로자들이 왜 지금 갑자기 집단행동으로 나섰으며 목청을 돋우고 있느지, 또 근로자들은 지금과같은 방식 외에는 좀더 현명한 방법이 없는지를 깊이 따져 보아야 할때다.
국가적 진통의 노사분규일병을 겪으면서 우리는 근로자 집단의 실체를 새롭게 인식해야 하며, 그들을 우리 모두의 동반자로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앞으로의 경제 발전은 물론 정치나 사회체제를 유지하는데 커다란 난관을 맞게된다는 인식이 이번 노사분규를 계기로 큰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실제 세계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경제발전, 특히 공업화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에서 노사문제를 피해간 나라는 아무데도 없다.
『지금의 노사문제는 근본적으로 산업발전의 급속한 템포속에서 빚어진 피할수없는 현상입니다. 그간의 성장우선정책에 눌려왔던 노동문제가 그 반동으로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지요. 동시다발에 따른 부작용이 우려되긴 해도 어차피 겪어야할 것을 겪는 것입니다』 배무기 서울대교수의 이같은 지적은 산업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근로자계층이 정치·사회·경제의 큰 뼈대를 이루는 계층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 우리의 국민경제 전체에서 그간 근로자 계층의 비중이 어느정도 빠른 속도로 커져왔는지를 보자.
본격적인 산업화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던 60년대초 우리나라 전체의 취업자, 곧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의 수는 7백60여만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그중 32% 2백40만명 정도만이 남에게 고용된 근로자였다.
집안 일을 거들거나 자기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통계를 보면 전체 취업자 1천5백50만명중 월급이든 일당이든 보수를 받고 일을 하고 있는 임금근로자는 전체의 54%인 8백40만명에 이르고 있다.
1천만 근로자라는 말이 실감나는 것이다.
국민소득이 나누어지는 것을 보아도 지난 60년에는 전체의 37.4%만이 이른바 피용자들의 몫으로 돌아갔으나 85년에는 절반이 넘는 54.8%가 그들의 몫이었다.
더우기 주목해야 할 것은 이처럼 크게 늘어난 근로자 집단중 대부분 해방이후 세대이며,전에 비해 눈에 띄게 학력이 높아지고 그만큼 자의식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보면 비농림어업 전제 취업자 1천1백80만명중 74%인 8백70만명이 40세미만이다. 모두 해방이후에 태어나 급속한 산업화 과정속에서 철이 들어온 세대들이다.
지난해 임금근로자 8백40만명중 중졸이하는 전체의 45%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55%인 4백60여만명이 고졸이상의 학력을 지녔다.
숫적으로 다른 계층을 압도하게된 이들 임금 근로자들의 가치관이 그들의 전세대와 크게 달라지고 그만큼 근로자들의 정치·경제적 기대치도 높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이처럼 숫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임금근로자 계층이 성장해온 것 자체가 바로 산업화의 한 소산으로 보아야 한다.
과거 경제기획원장관겸 부총리로 있으면서 성장우선정책을 밀고나갔던 남덕우무협회장은 최근 경제기획원이 주관한 민관경제사회협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한 적이 있다.
『경제발전 초기에는 노동의 공급이 워낙 과잉이었으므로 새로운 일자리의 마련이 노동법의 개정등 노동문제의 법적해결보다 앞세워질 수밖에 없었다. 영국·브라질·아르헨티나등 외국의 예는 아직도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오늘날의 진통은 임금수준자체라기보다 임금수준결정과정의 문제라고 본다.
경제성장 정책의 성공적추진으로 실업률이 떨어지는만큼 근로자 계층이 다수집단으로 성장하고 소득수준이 올라가는만큼 그들의 욕구도 높아져 간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그같은 사실을 수용하는 동시적 노력이 미흡했던 것은 성장우선정책의 실이었다.
그간의 정치적 변혁기에 근로자계층의 억눌렸던 욕구가 예외없이 터져나왔을때마다 유보와 억압에 치우친 임기응변식의 대응만이 있었지 예방적 차원에서 미리미리 손을 써오지 않았던 것이다』
임금결정과정에서 근로자들이 납득 또는 승복할 수 있고 기업경영자에 대한 신뢰감을 높이는 문제는 산업사회에서 건전한 노사관계를 정립시키는 기본이 된다.
외국에서는 노조의 조직과 노조활동을 통해서 그러한 문제를 대처해 왔지만 그러나 완전한 해결책은 아직도 못찾고 있다.
미국의 경우 산업이 더욱 고도화되면서 블루칼러의 숫자가 화이트칼러의 숫자에 역전당하기 시작한 50년대 중반을 고비로 노조조직률이 떨어지기 시작했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화이트 칼러라 할수있는 전문·기술·행정·관리·사무관련직 종사자는 약 3백만명인 반면 대표적인 블루칼러인 생산·운수·장비운전·단순노무직 근로자들만 합쳐도 4백90만명에 이른다.
더구나 상당한 학력간·직종간 임금격차라는 문제를 안고있는 이들 계층의 목소리는 어쨌 든 더이상 외면할수는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같은 전제하에서 서강대 박영기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최근의 부작용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만 하며 그러려면 노동운동을 종전처럼 좌경시하거나 몰아붙여서는 안됩니다.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고 설득이 통하게 되면 그간 소외감을 느껴왔던 근로자들이 귀속의식을 찾게 될것이며 그것이 이번 노사분규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소득이 될것입니다』
최근 중앙일보에 기고한 한여성근로자는 글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민주화를 원하지 않는 세력들에 어떤 명분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잘압니다….』 산업화·민주화 과정에서 겪어야할 갈등을 그 비용을 최소화시키면서 극복해갈 가능성이 깔려있음을 이 여성근로자는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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