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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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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명절 선물의 대명사는 뭐니 뭐니 해도 갈비와 굴비다. 특히 갈비는 부동의 챔피언이다. 2004년 광우병 파동 때 잠시 굴비에게 정상을 내줬지만 1년 만에 재탈환했다. 올해 역시 순위 변동이 없을 것이라는 게 유통업계의 예상이다.

하지만 선물의 역사에서만큼은 갈비가 굴비를 따라가지 못한다. 선물로서의 굴비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권신(權臣) 이자겸이 굴비를 처음 선물한 사람이다. 예종과 인종, 2대에 걸쳐 딸을 왕비로 만들어 권세를 부렸던 이자겸은 급기야 왕을 독살하려다 영광으로 유배됐다. 그곳에서 처음 굴비를 먹어봤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돌아앉은 시앗이 다시 오고 송장이 된 시어미가 벌떡 일어선다는 영광 굴비 아닌가.

그는 바로 왕에게 굴비를 진상했다. 재기의 기회라 생각했을 터다. 자존심은 있었던지 그 이름을 '굽히지 않는다'는 뜻으로 굴비(屈非)라 지었다고 한다. 이자겸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죽었지만 이후 영광 굴비는 궁중 진상품이 됐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 굴비는 국민적 음식이 된다. 순조 때 실학자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굴비를 "나라 안에서 귀천 할 것 없이 고루 먹으며 가장 맛있는 해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영광 굴비는 온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귀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 작명자의 의도가 불순했던 탓인지 굴비는 곧잘 뇌물로 둔갑하기도 한다. 몇 년 전 한 두름에 400만원이나 하는 황금 굴비가 팔렸고 굴비 대신 현찰이 든 굴비 상자 사건도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도 그랬던 모양이다. 이런 일화가 있다.

훌륭한 성품으로 높은 벼슬에 오른 선비가 있었다. 그는 굴비를 아주 좋아했다. 어느 날 젊은 유생 하나가 굴비를 싸들고 찾아와 청탁을 했다. 하지만 선비는 굴비를 받지 않았다. 이튿날과 그 다음날에도 유생이 찾아갔지만 선비는 굴비 선물을 거절했다. 이유를 묻는 유생에게 선비가 말했다.

"자네 굴비를 받았다가 벼슬자리에서 쫓겨나게 되면 나는 가난해질 텐데 그러면 다시는 굴비를 먹을 수 없지 않겠는가."

군침 도는 굴비 한 상자가 자신은 물론 젊은 유생까지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선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선물과 뇌물의 경계는 사실 모호하다. 특히 그것을 받는 자신에게 관대할수록 판단은 흐려질 수밖에 없다.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가 이를 경계해 일갈했다.

"공짜로 받은 선물만큼 비싼 것은 없다."

이훈범 주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