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리 "내가 성폭행 그렇게 많이 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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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성폭행이 너무 쉬웠다. 그래서 나중에는 범행이 습관처럼 굳어졌다."

10년 가까이 전국을 떠돌며 100여 명의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20일 구속영장이 신청된 속칭 '발바리' 이모(45)씨가 경찰에서 진술한 내용이다. 한번 범죄의 쾌락에 빠지자 별다른 죄의식이 없이 충동적으로 똑같은 범죄를 되풀이해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극히 평범한 가장이었다.

◆ "모멸감에 범행 시작"=이씨는 택시기사로 일하던 1996년 1월 술 취한 20대 여성승객이 "택시기사가 길도 잘 모르느냐"며 핀잔을 주고 욕설을 하자 모멸감을 느껴 이 여성을 혼내 주려고 결심을 했다. 그는 여성승객의 뒤를 쫓아가 집 문을 여는 순간 따라들어갔고 술에 취해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는 여성을 성폭행했다. 이씨는 순간적으로 '성폭행이 의외로 쉽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 수시로 성폭행 행각을 벌이게 된다.

그는 처음에는 주로 유흥업소 종업원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가정주부.회사원.영업사원.무직자 등 가리지 않고 범행을 했다.

그는 자신이 몇 차례 범죄를 저질렀는지 기억조차 못하고 있다. 경찰이 "유전자(DNA) 감식으로 확인한 범행만도 70건이 넘는다"고 알려주자 "내가 그렇게 많은 성폭행을 했나요"라며 스스로 놀랐다. 경찰에 붙잡힌 뒤에는 "마음이 후련하다"며 자신이 성폭행을 일삼아 왔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 치밀하고 다양한 수법=범행수법도 용의주도하고 다양했다. 이 때문에 경찰 수사는 수년간 겉돌았다. 경찰이 유전자 감식으로 확인한 이씨의 범행은 현재까지 74건. 감식으로 확인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100건이 넘을 것이란 게 경찰의 판단이다. 그는 2001년에는 여성 7명이 함께 사는 방 2개짜리 집에 들어가 3명을 성폭행하고 나머지 4명은 추행하기도 했다. 범행 뒤 경찰에 신고를 제때 못하게 하기 위해 피해자들의 휴대전화를 감춰 놓는 등 지능적으로 경찰의 추적을 피했다.

대대적인 검거작전이 펼쳐진 2001~2003년 초에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고 휴식기에 들어가기도 했다. 범행 뒤엔 현금만 빼앗고 수표 등은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성폭행 범인의 경우 유전자 이외에는 이렇다 할 증거가 없는 점도 이씨의 검거를 어렵게 만들었다.

대전동부경찰서 이동주 형사과장은 "발바리 검거를 위해 수집한 각종 자료만도 40여만 건에 이른다"며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유전자 감식이었다"고 말했다.

◆ '발바리'는 평범한 가장=경찰에 따르면 충남 공주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가정형편이 어려워 무작정 상경, 천호동 일대에서 구두닦이.신문배달 등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20대 초반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수년간 문방구를 운영하다 1990년부터 대전에서 택시운전기사로 일해 왔다.

3년간 택시회사에서 운전기사로 일한 뒤 93년 개인택시를 구입했다. 10년 정도 개인택시를 몰다 수사망이 좁혀 오자 2003년 4월 택시를 판 뒤 지금까지 일정한 직업 없이 살아왔다.

부인과의 금실도 좋았으며 20대 초반의 딸(회사원)과 아들(대학생)에게도 자상한 아빠였다고 한다. 실업자가 된 뒤에는 택시를 팔아 남은 돈 수천만원과 딸의 급여 등으로 생활해 왔다고 경찰은 전한다.

그는 또 축구를 좋아해 10여 년간 동네 조기축구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성격이 소심한 편이어서 회원들과 잘 어울리지 않아 이름을 기억하는 동료 회원은 거의 없었다. 10대 때 절도 전과 1건이 있지만 강력범죄를 저질러 처벌받은 적은 없었다. 이씨는 경찰에서 "새벽 무렵 가족에게 운동하러 나간다고 말하고 집에서 나온 뒤 범행을 했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그가 가정에서 워낙 평범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가족 누구도 그의 엽기적인 범행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발바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이상(異常)인격자'로 분류한다. 충남대 심리학과 장휘숙(58.여)교수는 "발바리의 행각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안정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증세"라며 "앞으로도 똑같은 범행을 저지를 수 있으며, 완치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대전=김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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