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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저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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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 스포츠부 차장

장혜수
스포츠부 차장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임기가 오는 20일 끝난다. 그는 퇴임 사흘 전인 17일, 백악관에서 지난해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팀 시카고 컵스 선수단을 만난다. 우승팀의 백악관 방문은 이듬해 시즌 중(6~7월)에 하는 게 관례다. 이례적인 연초 방문은 오바마 측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컵스는 지난해 108년간의 징크스(이른바 ‘염소의 저주’)를 깨고 메이저리그 정상에 섰다. 오바마는 잘 알려진 대로 컵스의 지역 라이벌인 화이트삭스 팬이고, 영부인 미셸이 컵스 팬이다. 혹시 이례적인 초대가 미셸을 위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연유야 어떻든 백악관 8년의 마지막을 메이저리그 우승팀과 함께하는 건 스포츠광인 그와 잘 어울린다.

 스포츠, 그중에서도 농구는 2008년 대통령 선거 첫 출마 때부터 오바마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였다. 고교 및 대학(2학년 때까지) 시절 농구선수로 뛰었고, 당선되자 백악관에 농구대를 설치했다. 재임 기간 중에도 틈틈이 농구를 즐겼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선거 전날 내지 당일 농구를 하면 선거에서 이긴다는 오바마의 ‘농구 징크스’도 유명하다. 오바마의 농구 일화 중 재임 기간 8년 내내 사람들이 특히나 관심을 가졌던 걸로는 이른바 ‘오바마의 저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매년 미국 대학농구(NCAA) 64강 토너먼트, 이른바 ‘3월의 광란’을 앞두고 자신의 예상 우승팀을 공개했다. 임기 첫해였던 2009년 노스캐롤라이나대(UNC)의 우승을 맞혔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 내리 7년간 예상이 빗나갔다. 오바마가 우승 후보로 꼽으면 중도 탈락한다는 ‘오바마의 저주’로 굳어졌다.

 자연스레 ‘한국이었면 어땠을까’ 가정해보게 된다. VIP가 초미의 관심을 가진 사안이 있다. VIP가 이와 관련한 예상 결과를 언급했다. 그런데 결과는 번번이 예상을 빗나갔다. 그게 수차례 반복되면서 VIP 이름에 ‘저주’가 결합했다. 한국이었다면 ‘저주’까지 가는 상황이 애당초 벌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스포츠 경기에서 VIP 뜻과 다른 결과가 나왔다면, 제일 먼저 심판이 경찰에 불려 갈 테니까. 또 그런 상황을 사전에 막지 못한 관련 협회 관계자와 공무원은 “나쁜 사람”으로 찍히고 “아직도 거기 있느냐”는 지적을 받을 테니까. 어디 그걸로 끝나겠나. VIP의 뜻을 거스르거나 모독한 이들을 분류해 ‘블랙리스트’에 올릴 테니까. 그리고 그들에 대해선 필요한 지원을 중단하고, 하려는 일도 원천봉쇄하고, 혹시 축하할 일이 생겨도 축전 같은 건 보내지 않을 테니까.

 오바마는 10일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에서 고별 연설을 했다. 그는 미 국민들을 향해 “매일매일 나는 여러분한테 배운다. 여러분 덕분에 나는 더 나은 대통령, 더 나은 사람이 됐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한국도 올해 새 대통령을 뽑고 현 대통령을 떠나보낸다. 감사 인사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부디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다”는 한탄만 아니었으면 한다. 그래야 국민들 역시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지 않을 테니까.

장혜수 스포츠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