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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한달] 호남 폭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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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육군 특전사 흑표부대 장병들이 19일 전남 함평군 나산면 촉포마을에서 폭설로 무너진 파프리카 농장의 파이프를 철거하고 있다. 함평=프리랜서 장정필

"국민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지 하는 게 군인의 임무죠."

19일 오후 2시 전남 함평군 나산면 촉포마을. 검은 베레모를 쓴 장병 20여 명이 지난해 12월 폭설 때문에 무너진 폭 21m, 길이 99m의 비닐하우스에서 쇠파이프를 뜯어 치우고 있었다. 일부는 높이 6m 꼭대기에 올라가 산소 절단기로 파이프를 잘라내고 있었다.

김원철(27) 중사는 "일이 힘들지만, 자포자기했던 농민들이 마음을 추슬러 재기에 나서는 모습을 보면 큰 보람을 느낀다"며 밝게 웃었다. 나흘째 장병들의 도움을 받아 비닐하우스를 철거하던 농민 이시행(46)씨는 "동생 같고, 친구 같은 공수부대원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작업하는 걸 보면서 용기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600평짜리 비닐하우스 두 동에서 파프리카를 재배, 9월까지 3억원어치를 수확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수확을 시작해 일주일간 1100만원어치를 땄으나 세 차례에 걸쳐 모두 1m가 넘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

육군 특전사 흑표부대에 육군본부로부터 '폭설피해 복구작전' 명령이 떨어진 것은 1차 폭설 10여 일 만인 지난달 15일. 602명의 장병이 이튿날 새벽 주둔지인 충북 증평군에서 트럭을 타고 5시간을 달려 전남 함평에 276명, 영광군에 326명 투입됐다. 피해 응급 복구를 지원하는 작전 기간은 보름 정도를 예상했었다.

그러나 현지에서 응급 복구를 지원하는 '작전'을 개시한 지 이틀 만에 2차 폭설이 내렸다. 이어 지난달 21일 세 번째 폭설이 쏟아지면서 19일 현재 35일째 피해 현장을 찾아다니며 복구작업을 돕고 있다.

다른 부대들이 일부 병력만 파견한 것과 달리 흑표부대는 부대 전체를 옮겨 오다시피 했다. 영광에 본부를 차리고 피해 현장을 돌며 지휘 중인 한동주 여단장(준장)은 "재난 재해 시 대민 지원도 군의 중요 임무 중 하나"라며 "상심에 젖은 농민들을 놔두고 발걸음을 돌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흑표부대 장병들의 일과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너진 비닐하우스의 비닐을 걷고 쇠파이프를 뜯어내거나 붕괴된 축사 등을 철거하는 일. 맨몸으로 절단기를 비롯한 장비를 가지고 3~6m 높이 위에서 작업하다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다. 또 지름 5~10㎝, 길이 5~8m의 파이프 등 무거운 것을 다루다 보니 작업 속도가 더디다. 대형 비닐하우스의 경우 한 동을 정리하는 데 20여 명이 일주일씩 걸리기도 한다.

우희석(42) 상사는 "40일 동안 부대와 집을 떠나 전술종합훈련을 하고 복귀한 지 열흘 만에 다시 대민 봉사를 하다 보니 아내와 중학생.초등학생 아이의 얼굴이 눈에 어른거린다"고 말했다.

이석형 함평군수는 "흑표부대가 공무원들이나 민간 봉사단체들은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을 도맡아 줘 폭설 피해 복구에 큰 힘이 됐다"며 "5월 나비축제 때 장병들과 가족을 초청하는 등 인연을 이어 가겠다"고 밝혔다.

함평=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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