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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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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기원전 494년.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싸움에서 패했다.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인질로 붙잡혀 묘지기와 마부로 일하는 수모를 겪었다. 3년 만에 귀국한 그는 20여 년에 걸친 복수극을 준비했다. 모략에 능한 문종(文種)이 몇 가지 꾀를 냈다. 미인계(美人計)가 핵심이었다. '삼십육계(三十六計)'에서 서른 한 번째로 꼽은 계략이다. 주인공 물색엔 범려(范)가 나섰다. 그 또한 오 나라로 끌려가 구천과 함께 고초를 당했던 인물이다. 범려는 자신의 연인을 천거했다. 서시(西施)다. 양귀비(楊貴妃).왕소군(王昭君).초선(貂嬋)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녀로 꼽힌다. 계략은 적중할 수밖에.

기원전 473년. 월은 마침내 오를 무찌르고 부차는 자결한다.

기쁨에 들뜬 구천이 논공행상에 바쁠 때 범려는 홀연히 떠난다. "구천은 고난은 함께할 수 있어도, 기쁨은 같이 나눌 수 없는 군주"라는 게 이유였다. 반면 범려의 떠나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연연하던 문종은 구천의 의심을 사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로부터 3세기가 지난 기원전 196년.

유방(劉邦)을 도와 항우(項羽)를 격파했던 한신(韓信)은 범려와 문종의 예를 몰랐거나, 모른 척했던 모양이다. 전쟁이 끝나 유씨(劉氏)에 의한 한(漢) 제국 틀이 확립되자 제거 대상이 됐다.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지고, 나는 새가 잡히면 좋은 활도 광에 처박히는구나(狡兎死 良狗烹 飛鳥盡 良弓藏)." 쓸모 없어진 사냥개 신세를 탓하기엔, 한신의 후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인사철이다. 정부 차원에선 설을 앞두고 차관급 인사가 있을 예정이다. 신문 '인사란'에는 이런저런 기업.단체의 임원 인사가 빼곡하게 실린다. 승진을 알리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사 독법(讀法)'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자리를 떠났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축하 난(蘭) 화분의 요란한 쇄도와 달리 한쪽에서는 책상 정리 손길이 조용하다.

개중엔 '팽(烹)' 당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미리 범려의 지혜를 준비했더라면 마음이 조금은 덜 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게 말이 쉽지, 실제 그렇게 마음먹기가 어디 간단한 일인가. '항산(恒産.일정한 수입 또는 생업)'이 없음에 '항심(恒心.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기 어려운 게 보통 사람들의 삶이 아니던가.

유상철 국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