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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잡다가 독깨는 우 경계하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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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태풍·물난리에 놀란 가슴이 채가라앉기도 전에 전국 곳곳 사업장에서 노사분규의 불협화음이 폭우 뒤 산사태의 굉음처럼 꼬리를 문다.
임금 인상, 어용노조 퇴진, 민주노조결성, 근로여건 개선등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요구와 주장들이 댓바람에 시위·농성·파업의 극한투쟁으로 치닫고 주먹과 각목·돌멩이까지 날으는 살벌한 대결로 번지고있다.
장마에, 무더위에 가뜩이나 우울하고 짜증스런 국민들에겐 또다른 근심의 먹구름이다.
과연 이것이 온 국민이 그토록 열망하던 민주화의 서장에서 펼쳐져야만할 정경일까.
이러다간 어렵사리 시작한 민주화의 대행진에 어쩌면 돌이킬수 없는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그동안 노사관계의 모순과 갈등이 순리로 풀리지 못한채 많은 경우 근로자의 울분으로 쌓이고 쌓여온 것도 사실이다.
성장과 수출 신장에 역점을 둔 정책은 근로자의 기본권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었고, 노동정책이 근로자의 권익보장이 아니라 거꾸로 보장요구를 제도적으로 막는데 한몫을 해온 측면도 없지 않았다. 사용자 쪽에서도 근로자들의 어려움을 나눠 가지려는 자세보다 공권력의 보호 그늘에서 불공정배분의 자기몫을 키우면서 오히려 군림하고 으스대는 사례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기에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근로자들이 그동안 억눌렸던 자기 주장을 목청 높이 외치는 것을 탓할수만은 없다. 오히려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민주적 노사관계는 사용자측의 각성·양보와 함께 근로자들의 분별과 자제, 그리고 호양의 정신이 요청되는 쌍방관계다.
이렇게 볼때 최근 사태에서 제기된 근로자들의 요구와 그 추구방식은 이 쌍방관계의 인식이 부족하거나 저버린 인상이 없지않다. 지난 봄 인상한 임금을 30∼50%까지 다시 올려라, 연4백%인 상여금을 6백%로 올리고 호봉 승급도 연2회로 해달라, 경조부조금도 2배로 늘려라, 토요일 조기퇴근을 실시하라, 휴가비도 더 달라, 두발 자유화를 해달라, 경영 참여권을 인정하라……자그마치 23가지 요구를 한꺼번에 내건 사례도 있었다.
이와같은 요구조건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과연 이에 다 응해줄수 있는 기업이 몇이나 될까 의심스럽다.
무엇보다 이렇게 한꺼번에 내건 요구를 안들어주면 공장에 불을 지르고 생산시설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기업주의 화형식까지 벌이고 나서는데는 아연해지지 않을수 없다.
이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공존공영의 관계를 설정하려는 민주적태도가 아니라 원한과 분노에 사로잡혀 공존의 터전을 깨뜨려버리려는 이판사판의 태도로밖에 볼수 없다.
그동안 국민들은 실망스런 정치에 울분을 삭이면서도 경제에 위안과 미래에의 기대를 걸어왔다. 경제가 순조롭게 돌아가고 성장을 계속하는한 정치는 결국 「포니」 차로 비유된 경제의 수준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으며, 경제가 정치발전의 뒷받침을 할것이라고 지금도 다수 국민은 믿고 있다.
그런데 경제가 흔들린다면….벌써 기업 생산이 위축되고 수출이 둔화된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 경제의 활력소가 됐던 저유가·엔고현상등 3저 호황도 이미 막을 내린 마당이다. 보호무역의 장벽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경제의 후퇴가 정치발전조차도 뒷걸음치게하는 구실이 될지도 모른다. 근로자와 기업 경영자, 그리고 국민각자가 그동안 합심해 쌓아 올린 경제의 「기적」 이 하루아침에 도로아미타불이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걱정스런 것은 최근 일련의 과격한 노사분규 배후에 「민중혁명노선」 을 신봉하는 일부 급진세력의 개입과 조종의 기미가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부산 국제상사 분규 현장에는 화염병까지 준비한 운동권 학생들이 앞장섰다. 울산 현대증공업 농성 사태를 주도한 근로자들 가운데는 상당수가 외부의 반체제운동 조직에서 의식화학습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방학을 맞아 운동권의 급진세력들은 이른바 「노학연대투쟁」 을 내걸고 울산과 부산을 거쳐 여천공단지역으로 그 활동무대를 옮겨가고 있으며 경인지역 공단에서도 일부운동권학생들이 「공활」 이란 이름의 의식화활동을 광범하게 펼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동안 국민들의 냉담한 반응과 공권력의 강력한 대응에 짓눌러 「위장취업」 이란 전략으로 음성화됐던 급진 운동권 활동이 민주화의 시류에 편승해 이제 공공연히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볼수 있다. 그들에게는 열병처럼 번지고 있는 생산현장의 진통이 「민중폭력혁명」 의 서곡으로 들리고 있음이 틀림없다.
새학기에 들면 운동권학생들이 심어놓은 불씨가 현장의 분규로 폭발하면서 「총성없는 내란」 의 사태로 번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청계피복노조·원풍모방·동일방직·YH노조사태의 악몽이 재연될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도 나오고 있다. 물론 우리의 성숙한 근로자들이 이런 사태에 휩쓸려들지는 않을줄 믿는다.
그렇지만 순수한 근로자들의 정당한 요구가 급진세력이 의도하는 폭력적 민중혁명의 도구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경각심은 필요하다. 당국도 이것만은 철저히 봉쇄하고 강경한 대응책을 마련해야한다.
노동운동은 근로자들의 보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기업내부의 활동으로 전개되고 근로자와 사용자가 호양의 정신을 바탕으로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사용자와 근로자 모두가 쥐잡으려다 독을 깨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김창태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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