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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와 시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이란인들의 대아랍 민족감정은 유명한 「카르바라의 비사」로 집약된다. 서기 680년 이란계 지도자 「후사인」 일가가 아랍계에 의해 학살된 비극이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사촌이며 사위였던 초대 이맘 「알리」가 암살되고 그의 큰아들「하산」이 칼리프(집정자)가 되었다.
하지만 시리아 태수 「무아위야」의 세력이 강성해서 그 자리를 물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뒷날 칼리프 자리는 「하산」의 동생 「후사인」에게 넘겨 준다는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뿐더러 우마이야 영내 쿠파주민의 구원요청에 응해 이라크로 들어간 「후사인」군 2백여명은 우마이야군에 모조리 살육당했다.
오직 살아남은 것은 「후사인」의 어린 아들 「알리」와 두딸뿐이었다.
이란인들은 페르시아계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이들 「알리」와 두딸을 진짜 이맘으로 추대할때 페르시아 왕통이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1502년 12 이맘파가 이란의 국교로 선포되고 아랍의 수니파에 대한 페르시아의 독자성이 선언되었다. 이것이 「이란적 이슬람」인 시아파의 출현사건이다.
시아파의 시아는 「알리의 당파」란 뜻이다. 알리를 이맘의 시조로 믿는 파다.
이에반해 수니파의 수니는 「마호메트의 언행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뜻이다.
혈통을 중시하는 시아파 이란인들은 이란 민족주의를 표방한다.
이란인들은 이슬람역으로 10월인 무하람을 금식절인 라마단보다 더 크게 생각한다.
그래서 무하람의 10일동안 검은 조기를 걸고 「알리」 와 「하산」과 「후사인」을 외치며 몸에 스스로 매질을 하며 거리를 행진한다.
「후사인」의 순교장면을 연출하고 칼이나 쇠사슬로 자해하면서 피를 흘린다. 애도의 감정이 사무치면 거리는 울음바다를 이룬다.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카바신전이 79년에도 이란의 시아파 광신도에 의해 점거된 적이 있었다.
1천1백명의 사상자를 낸 이번 메카의 참사를 보며 민족분쟁에다 종교분쟁까지 겹친 중동의 비극이 인류의 비극을 표상하고 있다는걸 새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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