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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영<연세대교수·행정학>|민주화성취가 통일의 지름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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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독의 국가원수인 「호네커」가 오는9월 서독을 방문한다는 공식발표가 나왔다. 이것이 성사되면 동독 국가원수로서 사상 최초의 서독방문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영월」시대로 진입하는 동·서독관계를바라보며, 아직도 남북한간의 대결구조를 크게 개선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처지가 새삼 부끄럽게 느껴진다.
평화공존과 교류를 바탕으로 하는 동·서독간의 현존 평화구조가 독일의 궁극적인 정치적 통일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미흡한 해결방식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독일민족이 겪고있는 분단의 고통을 크게 덜어주고 민족화합을 수월하게 해준다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동·서독간의 평화정착과정을 살펴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되새겨 보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독정부의 대동독내지 통독정책을 시대적으로 구분할 때 크게 「아데나워」시대, 「브란트」시대, 그리고 그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아데나워」는 냉전시대의 논리에 따라 강경한 반공정책으로 일관하며 서독이 전독일의 유일·합법정부임을 크게 내세웠다. 그러나 희대의 옹고집 「아데나워」도 동독과의 정치회담을 극력 회피하면서 항상 그와의 비공식 접촉 여지를 남겨 놓았고, 또 이 통로를 통해 쌍방은 그때 그때 현안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이제나 저제나 서독이 큰소리를 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동쪽 형제들보다 인구·땅덩이·경제력등에 있어 월등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세상이 다 아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찬연한 빛 앞에 공산독재국가 동독의 모습은 왜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당시 동독은 초기 한때 통일문제를 강조하기도 했으나 적화통일은 커녕 자기체제의 유지도 어렵게 되자 분단 고정화를 꾀하는 「1민족 2국가」정책으로 크게 선회한다. 1961년의 베를린장벽이 그 극적인 표현이었다.
1969년 서독에서 사민당의 「브란트」정권이 들어서면서 독일문제에 관한 급격한 정책변화가 이루어진다.
「브란트」는 이른바 「동방정책」의 기치아래 1972년 12월 동독과 역사적인「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그간의 불신을 씻고 양독간 평화구조의 정초를 마련했다.
그는 모든 문제를 동독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고, 또 그 과정속에서 동독정부를 서독정부와 대등한 위치로 격상시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브란트」는 협상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난제들을 가능한한 뒤로 미루고 보다 실질적이며 합의 가능한 문제해결에 앞장섰다.
동·서독간의 평화구조를 이해하는데 주요한 매듭의 하나는 경제거래·인적교류등 양독간의 활발한 평화교류다. 그간 서독은 동·서독간 교역을 상호 접촉의 매개체로 삼으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고, 그 때문에 자신에게는 별소득 없이 주로 동독부흥에 이바지하는 경제거래를 꾸준히 계속해왔다.
현재 동독이 서독의 열번째 교역국가인데 반해 서독은 소련에 이어 동독의 두번째 교역상대국으로 동독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크다. 서독은 교역이외에도 이미 오랫동안 동독에 푸짐한 차관을 공여해 왔다.
동·서독간의 인적교류도 매우 인상적이다. 그간 주로 노령의 연금생활자들에게만 서독방문을 허용하던 동독도 최근 인적교류정책을 크게 완화하여 올해에는 비연금생활자의 서독방문이 1백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1년내내 양독간의 문화·종교·스포츠교류가 줄을 잇고 있다. 이렇듯 양독간의 평화교류가 모든 생활영역으로 확산됨에 따라 민족이산에서 오는 인간적 고통이 크게 완화되었고, 상호간의 이질성이나 위화감도 많이 해소되고 있다.
서독에서 사민당정권이 물러서고 「콜」수상의 기민당정권이들어섰으나 양독간의 평화구조는 조금도 흐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분단의 고착화와 「1민족 2국가」론을 고수하던 동독이 최근 그 강경한 자세를 조금씩 풀며 게르만민족주의차원에서 독일문제에 접근하고 있는것도 중요한 변화양상이다.
우리와 비교할 때 독일인의 통일인식은 매우 냉철한 현실기반위에서 형성되며, 민족정서의 표출도 그만큼 절제된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독일의 재통일을 가로막는 국제정치적변수들을 그들이 한결같이 인식하고 있고, 이를 하나의 한계상황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제도화된 평화구조를 구축하는 과정속에서 서독은 큰형님다운 포용력으로 승부전략 아닌 타협전략으로 일관해 왔으며, 점진적이며 장기적 관점에서 상황극복을 위해 모든 대화및 교류과정을 이끌어 왔다.
그렇다면 서독의 이러한 확신에 찬 발걸음, 그 놀라운 추진력의 바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서독의 월등한 민주·복지역량인 것이다. 세상에는 고르게 잘사는 민주국가를 상대로 적화야욕을 불태우는 무모한 공산정권은 없다. 우리가 여지껏 남북한관계에서 큰형님다운 의연한 모습을 과시하기 어려웠던 것도, 또 북한이 아직도 적화야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우리책임이고 우리 체제의 취약성에 그 깊은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민주화의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민주화의 성공적인 성취가 바로 이땅에 평화구조를 정착시키고, 멀리는 통일을 지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도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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