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허가없이 학급문집냈다" 교사 해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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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겨운 시험이 바로 오늘, 어려운 문제가 항상 나를 괴롭혀요. 시험지 들고 집에 가면 매매 맞고 울지요. 「다음엔 잘 해야지」하고는 또 틀리는 시험.』 서울 W국교 5학년11반 어린이들이 지난해 6월 발간한 학급문집 『새소리』에 실린 「시험」이란 제목의 시.
한학기동안 학생들이 쓴 시·일기·생활문·독후감·주장·극본등이 그림과 함께 36페이지에 빼곡히 실려있다.
이 학급의 담임 C교사(27)는 특별활동 시간을 이용, 글짓기 지도를 하고 일기 점검을 통해 작품을 수집한뒤 꼬박 열흘동안 어린이들과 편집작업을 한끝에 이 학급문집을 탄생시켰다.
서툰 글씨에 조잡한 편집이지만 이 문집에는 학급어린이들의 생활모습과 다양한 목소리가 담겨있다.
그런데, 이 문집이 배포된지 1주일만에 담임 C교사는 교장에게 불러갔다. 『문집에 실린 글들이 정말 학생들이 쓴 작품이냐』는 예상밖의 추궁을 받았다.
C교사는 칭찬대신 시말서와 진술서·각서를 쓰고 3일 동안 수업을 박탈당했다. 물론 학생들에게 배포된 문집도 모두 회수되었다.
이 학급문집으로 C교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난해 12월 서울시교위 징계위원회에 회부되는 지경에 까지 갔다.
학급문집과 관련된 C교사의 징계사유는 「학교장의 허가없이 독단적으로 학급문집을 발행해 학생과 외부인사들에게 배포했고」, 「학생작품 71편 가운데 시험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묘사한 15편을 싣는등 학생들이 학교 방침에 반대하도록 은연중에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C교사는 학급문집 사건이 계기가 돼 국가공무원법상의 성실의 의무, 복종의 의무, 품위유지의 의무에 위배됐다는 이유로 결국 징계, 해임됐다.
C교사는 이에 대해 『학생들의 글에 시험과 관련된 것이 많은 것은 그들의 생활이 시험에 얽매어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학생들의 솔직한 표현을 문제삼는 것은 교사의 수업권을 박탈하는 행위일뿐 아니라 학생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허용하는 민주시민 교육의 기본 전제에도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C교사는 최근 해직교사 복직조치에 따라 현재 교단으로 되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학급문집은 교실의 언론매체라고 교사들은 말한다. 학급 구성원의 생활이나 생각이 문집이란 매체를 통해 서로 표현되고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급문집 제작에는 교사의 열성과 학급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제작에 대한 외부(학교 또는 행정기관)의 간섭은 결국 학급언론의 활성화를 가로막고 민주화의 요체라고 말하는 대화와 토론을 발붙이지 못하게 한다.
경남 거창의 S국교 K교사는 학급문집활동을 통해 모범적인 글짓기교육을 한다고 칭찬을 받아오다 하루아침에 타교로 강제 전출되는 고초를 겪었다.
85년에 6학년 담임으로 만든 학급문집에 실린 「장학사 오는 날」이란 학생의 글 때문이었다.
「장학지도를 나온 장학사는 폼을 잡고」「선생님들은 설설 기며」「환경정리를 하느라 법석을 떤다」는 글의 내용이 웃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던 것이다.
학생들의 눈에 비친 장학지도의 모순이 시정은커녕 담임교사를 곤경에 빠뜨린 결과가 된것이다.
현재 전국에서 발간되는 학급문집은 국민학교가 1천여종, 중·고교가 각각 40여종에 불과하다(한국글쓰기교육 연구회 집계).
중·고교에 학급문집 활동이 부진한 것은 시험준비에 매달려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사들이 문집 제작에 대한 간섭을 받기 싫어 꺼리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글쓰기교육연구회 회원인 L교사(32·서울T국교)는 『문집을 만들 경우 대부분 교사의 주머니 돈을 털어야 하는데도 학교관리자는 격려는 커녕 감시의 눈을 보낸다』며 『심지어 학교장이 문집에 실릴 글을 사전 검열하는 경우도 있어 학생들의 솔직한 글을 그대로 실을 때는 주저하게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역경속에서도 H교사(서울S국교)는 4개 국교를 옮겨가며 11년동안 54회째의 학급문집을 만들었고 『들꽃』『해뜨는 교실』등은 학급문집이 모아져 어엿한 단행본으로 출판되는등 다양한 내용이 어린이들의 천진한 목소리에 실려 나온 책이 30여권이나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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