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도 학부모도 교사도 '논술 고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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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매주 논술 문제를 주긴 하는데, 검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문제를 받고 나서 잊어버린다."(대원외고 1학년 이모군.16)

주요 대학의 정시 논술 문제를 접한 학부모와 학생들은 앞이 캄캄하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고, 논술 문제는 턱없이 어렵다는 것이다. <본지 1월 17일자 1, 4, 5면 참조>

D외고 1학년 아들을 둔 학부모 노모(42)씨는 "문제를 보니 논술에 올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주변에서는 벌써 학교에서는 기대할 것이 없다며 학원이나 소수 정예로 그룹을 짜고 좋은 논술 선생님을 찾기에 바쁘다"고 말했다. 고1, 고3 자녀를 둔 학부모 강모(44)씨는 "논술이 어려워 걱정은 태산 같은데 어디 가서 뭘 해야 할지 몰라 너무 막막하다"며 "책을 읽으란 소리만 하고 손 놓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논술 지도를 해야 하는 일선 고교 교사들도 난감해 하는 분위기다. 서울 D여고 윤모(국어) 교사는 "논술이 쉬우면 힘이 들더라도 떠안고 갈 수 있지만 이렇게 어려워서는 교사들이 자기 전공도 아니면서 아이들을 제대로 지도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잠실고 이원희 교사는 "내신시험의 서술형 평가를 늘려나가고 교과 안에서 토론식 수업이 이뤄지도록 하는 등 학교에서도 나름대로 논술 대비를 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논술학원가에는 학부모의 문의가 늘고 있다. 서울 대치동 임부택 국어논술학원(초등부)의 장영숙 상담원은 "이미 고교생은 물론이고 중학생.초등학생들의 수강 문의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교수들도 대입 논술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용인대 이동철(동양철학) 교수는 "현행 논술 문제들은 대학원 석사과정 학생들이나 읽을 만한 책에서 지문을 낸 경우가 많다"며 "학생들의 종합적인 사고력을 측정한다는 논술의 취지에서 벗어나 '변별'만을 앞세운 기괴한 시험"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서울대 글쓰기교실 김준성 선임연구원은 "대학에서의 수학 능력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수준의 글은 쓸 수 있는지 측정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고정애.한애란 기자

[뉴스 분석] 대학은 교과서·추천도서에서 출제를
정부는 '3불정책' 등 대입 규제 풀어야

대학 입시에서 논술시험을 치르는 것은 학생들의'읽고 생각하고, 쓰는 힘'을 측정하기 위해서다. 학생들이 대학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소양을 갖췄는지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논술시험 자체는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지나치게 어려운 논술은 학생의 근본적인 실력보다 '논술 기술'을 파악하는 시험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학생들은 논술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으로 몰리고, 이에 따른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다. 2008학년도 입시부터는 논술 비중이 더 커진다. 지금부터라도 논술시험을 정상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이들의 고통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단기적으로는 대학의 논술 출제 방향부터 달라져야 한다. 학생들의 종합적 사고력을 측정할 수 있는 선에서 적절한 수준의 제시문과 논제를 출제해야 한다. 교과서에 바탕을 둔 지문을 내거나 대학이 고교생에게 읽히고 싶은 추천 도서를 미리 발표하고 그 안에서 지문을 출제하는 것도 방법이다.

초.중.고교의 수업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암기 위주가 아니라 깊고 넓게 생각하고, 뒤집어 생각하는 사고력 중심의 교육을 해야 한다. 토론식 수업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단지 대입 논술에 대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이런 교육 자체가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길이다. 당장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교사들이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노력해야 한다. 교육 당국은 교사 연수 등을 통해 이런 수업 방법을 확산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본고사.기여입학제.고교 등급제를 금지하는 '3불 정책'을 포함한 대학 입시 규제가 풀려야 한다. 지금처럼 입시를 특정조건을 붙여 묶어 놓아서는 대학들이 수험생의 변별력을 확보하기에 유리한 수단으로 판단하는 논술시험을 비비 꼬아 출제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김남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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