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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이 이룬 민주주의 고맙지만…사다리 끊긴 지금, 뭐가 나아졌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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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박종철 언어학과 30년 후배 김현진씨의 2017년

고 박종철씨의 30년 후배인 김현진씨. 과방에 박씨 사진이 붙어 있다. [사진 김상선 기자]

고 박종철씨의 30년 후배인 김현진씨. 과방에 박씨 사진이 붙어 있다. [사진 김상선 기자]

서울대 언어학과 과방(해당 학과 학생들의 자유공간)에는 1987년 1월에 숨진 고(故) 박종철씨의 영정 사진이 있다. 30년이 지난 2017년 1월 그의 30년 학과 후배 김현진(22)씨는 이 방에서 웃고, 떠들고, 때론 한숨을 쉰다. 1995년생으로 대학 3학년인 김씨에게 역사책에서 본 ‘선배의 시대’는 낯설다. 김씨는 “선배 세대가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가 참 고맙다. 그런데 이른바 ‘끊어진 사다리’(계층 상승 기회의 단절을 의미)를 보면 진짜 나아진 게 뭔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김씨의 최근 6개월과 박씨 삶의 주요 장면을 비교해 30년 전 청년의 ‘역사적 고민’과 이 시대 젊은이의 ‘실존적 고민’의 간격을 들여다봤다.

다른 차원의 노동, 7월

학비 대려 아르바이트 3개
‘문과생이라 죄송’한 시대
AI스터디 해도 미래는 불안

85년 여름 박씨는 “노동자의 삶을 배우겠다”며 두 달간 공장에서 일했다. 과외금지령 때문에 생활비는 ‘비밀과외’로 충당했다.

김씨는 세 개의 아르바이트에 매달렸다. 과외 두 개와 음식점 서빙이다. 벌이의 30%는 저금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학비를 모아야 한다. 2015년 기준으로 대학생 71만 명이 학자금 대출 2조1000억원을 받아 학비를 충당했다.

분노한 11월

대학 1학년이던 84년 11월 박씨는 회사의 부당해고에 맞서 분신한 택시기사 박종만씨의 소식에 분노했다. ‘학생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한 방황을 접은 계기였다.

김씨는 지난해 11월 난생처음 집회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주말 아르바이트도 미뤘다. 그는 “‘87년 6월 세대’ 중 일부가 기득권을 쥔 뒤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고 말했다. 집회 후 그는 친구들과 만나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사는 게 30년 전보다 나아졌다는 확신 따윈 잃었다. ‘개천에서 나온 용’을 보기가 힘들어진 요즘 ‘탈조선’ 외에는 답이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박종철은 『자본론』읽으려, 우린 스펙 갖추려 외국어 공부”

불안했던 12월

85년 12월, ‘비밀 서클’ 모임을 가던 박씨에게 경찰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뒤도 안 보고 차로를 건너 도망쳤다. 언어학과 학생회장인 그는 서클에서 학생운동을 모의했다. 학회 두 개도 이끌었다.

2016년 12월 서울대 언어학과에는 학생회장이 없었다. 신입생 때 뽑은 학년 대표는 경영학과로 전과했다. 학회는 취업 중심의 ‘스터디’가, 서클은 취미 위주의 ‘동아리’가 됐다. 김씨도 지난해 12월 스터디와 동아리 활동으로 바빴다. 원래 하던 인공지능(AI) 스터디에다 언어학 스터디를 새로 꾸렸다. 그래도 불안하다. 그는 “취업 준비 중인 선배들은 ‘50곳에 원서를 쓰더라도 한 개만 붙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아등바등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20대 실업률은 12.5%(2월)까지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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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다른 공부, 1월

86년 1월 박씨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어머님은) 대학원 진학을 원하신다.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꼭 석사과정이라도 마치고 학교에 남든 직장을 구하든 소위 출세를 하라신다….” 다음 편지에선 “(내 다짐은) 참 민주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썼다. 이듬해 1월 그는 숨졌고,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2017년 1월 김씨의 다짐은 ‘AI 공부를 위한 대학원 진학 준비를 잘 하는 것’이다. ‘문송합니다’(문과생이라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일상화된 요즘 AI 전공자는 일자리 걱정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박씨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으려고 일본어를 공부했다. 국어 번역서는 출판이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김씨는 대학원 진학용 ‘스펙’을 갖추기 위해 스페인어를 공부한다. 전국 4년제 대학의 평균 취업률은 64.4%(2015년), 지난해 서울대 인문대의 취업률은 59.9%다.

특별취재팀=한영익·윤정민·김민관·윤재영 기자 hanyi@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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