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자민 간사장 “10억 엔은 소녀상 이전 대가”…노골화하는 이전 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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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후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에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꽃들이 놓여 있다. [부산 = 송봉근 기자

6일 오후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에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꽃들이 놓여 있다. [부산 = 송봉근 기자

“(일본 정부가 거출한 10억엔이) 싫다면 안 받으면 될 일이었다. 받을 것을 받은 뒤에 이러는 게 이상하다. 앞으로의 긴 일한 역사를 생각해도 서로 좋지 않다.”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간사장은 7일 TV아사히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 부산 소녀상 설치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쏟아냈다. 6일 녹화해 8일 방영된 NHK <일요토론>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역시 10억엔(약 100억원)을 걸고 넘어졌다.

“일본은 성실히 의무를 실행하는 차원에서 10억 엔을 이미 거출했다. 한국이 확실히 성의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정권이 바뀌어도,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국가의 신용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본 국내에서조차 “아무리 강경파라 하더라도 일본 정계서열 1위(내각 총리)와 2위(여당 간사장)의 발언이라고 보기엔 노골적”이란 평가다. 보증금을 내줬는데도 셋집(서울 소녀상)을 빼지 않고 군식구(부산 소녀상)까지 데려와 막무가내로 버티고 있다는 식의 태도다.

외교 전례에 비춰봐도 이 같은 일본의 반응은 상식적이지 않다. 이 때문에 2015년 연말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논란을 키워온 ‘이면 합의’의 존재 여부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한일 정부가 소녀상 철거 이전을 전제로 위안부 합의를 타결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합의 이후 일본 언론은 때마다 익명의 정부 관계자나 여권 핵심 관계자를 인용해 이면 합의를 기정 사실화해 왔다. 이른바 ‘10억엔 대가론’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과거를 사죄하는 의미로 돈을 낸 것이 아니다. 일본 정부는 매스컴을 통해 꾸준히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만들기 위한 투자금으로 포장했다. 그리고 현실적인 반대급부로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를 한국 정부로부터 약속 받았다고 설파했다.

부산 소녀상 설치가 ‘방아쇠’ 역할

부산 소녀상 설치 이전까지는 익명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일부 극우 인사들은 연기를 피웠다. ‘아베의 카게무샤(影武者)’로 통하는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관방부(副)장관이 대표적이다. 위안부 합의 한 달 전 서울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도 아베 총리를 수행한 것은 하기우다 부장관이었다.

누구보다 위안부 합의의 배경을 잘 아는 그는 합의 이후 ‘10억엔 거출의 전제 조건=소녀상 이전’이라는 공식을 틈만 나면 밝혔다. 지난해 연말까지도 이 같은 주장은 ‘비공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결국 부산 소녀상 설치가 ‘10억엔 대가론’을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표면화하는데 방아쇠 역할을 한 셈이다.

전조도 있었다. 일본 보수 우파의 정론지인 요미우리신문은 지난해 12월 27일자에서 부산 소녀상 설치 움직임을 크게 다루며 “일본 정부가 내준 10억엔 중 일부가 위안부에게 전달됐다”는 사실을 리드로 내세웠다. 지난해 10월부터 한국 측 ‘화해·치유 재단’을 통해 합의 당시 생존 위안부 46명 중 70%(34명)에게 1억원씩 지급했다는 것이다.

‘한일 정부 합의→지원금 거출→위안부 지급’이란 일본 정부가 구상했던 밑그림이 완성된 만큼 더 이상 한국에 끌려 다닐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그러면서 박근혜 정권의 몰락으로 ‘최종 해결’된 문제를 다음 정권에서 ‘역행’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국제사회가 일본의 거친 입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데도 사실상 외치 기능이 정지된 한국 정부는 제대로 된 대응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외교부는 “이면 합의가 없었다”는 기존 입장만 되풀이하며, 시간만 지나가기를 바라는 눈치다. 해묵은 문제를 풀자고 맺은 합의가 한일 관계의 새로운 족쇄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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