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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매창 ㅡ거문고를 사랑한 조선의 뮤즈ㅡ #8. 벼락처럼 만나고 번개처럼 헤어지다 (4)

중앙일보

입력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한양은 멀고 적은 가깝다 하고. 너를 여기 두고 어찌 갈지.”

그의 말속에서 이별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마음을 아무리 차갑게 식히려 해도 눈빛이 뜨겁게 타올랐다. 매창은 그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그를 붙잡고 싶었다. 농부의 종아리에 달라붙은 거머리가 되어도 좋았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그건 아니다. 자신이 그럴 수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서도 아니 될 것이다. 체념은 그녀가 배워야 할 덕목이었다. 햇볕이 가지나 호박, 무나 토란 줄기를 말리듯이 굳은 다짐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허튼 소망을 거둬갔다.

“가실 것이라면 더 지체하지 말고 가시어요.”

유희경은 가만히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애잔한 눈빛이었지만 또한 어떤 흔들림도 없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그가 가진 엄격한 내면의 질서가 두려웠다. 그것은 그녀의 또 다른 적이었다. 지배하려고도 지배당하려고도 하지 않는 영혼의 야성은 무섭도록 매혹적이었다. 그녀를 죽이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끌려갔다.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다. 매혹은 가까이 다가오는 사랑을 집어삼키고 절망에 빠뜨리는 권력이었다. 위대한 자들의 삶은 타인의 피를 필요로 한다. 유희경은 겉으로는 언제나 평온하지만 내면은 드센 파도로 출렁였다. 이루고 싶은 것이 많은 큰 재주를 가진 사내인 것이다.

“기다릴 수 있겠지? 인생길이 만 리라지 않더냐? 만 리나 되는 긴 강에 어찌 천 리 한 굽이가 없겠느냐? 그렇게 믿자.”

“약속해주시어요. 다시 저를 찾겠다고. 아니어요. 훗날을 기약하지 마시어요. 차라리 지금 한 달만 더 계셔주세요. 아니어요. 열흘만. 열흘이라도 곁에 남아주세요. 더는 원하지 않을게요. 서로 시나 주고받으며 열흘만 같이 살아요. 한 달도 아니고 보름도 아니어요. 열흘, 열흘만 저를 위해 남겨두시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그가 오랫동안 거느리고 살았던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땅 가까이 내려오기 시작한 해가 그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고즈넉이 내려앉은 노을과 슬며시 고개 드는 어둠. 눈빛 하나, 입술 모양 하나로 열 가지 표정이 만들어지고 만 가지 생각을 표현했다. 가슴속에서 타고 있는 불덩이가 표정이나 눈빛을 빌려 밖으로 밀려 나왔다. 불길을 둘러싸고 있는 살얼음과 무지개, 아지랑이 같은 갖가지 현상들이 자리다툼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방을 나선다. 등을 보인 채 속에 맺힌 말을 쏟아냈다.

“가시어요. 당신은 가실 분이니까요. 그리 꼭 가셔야만 하는 이유를 나는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아요. 소견 부족한 제가 어찌 당신의 크고 넓은 마음을 헤아리겠어요. 눈먼 어리석은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매창은 말소리를 꾹꾹 눌러 또박또박 말했다. 약해진 자신을 내보여야 덜 아플 것 같았다. 지독하게 외롭구나. 연모하는 일은 외로움이 깊어지는 일이구나. 다시 혼자가 되겠구나. 그 생각뿐이었다. 이 생각이 부디 오래 머물지 않기만을 바랐다.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손아귀에 휘말려 들지 않는 유희경의 원칙이 원망스럽지만 탐나기도 했다.

“그러마. 급한 시국이 지나고 나면 내 너를 다시 찾아오마. 그때 열흘 동안 시로써 너를 만나마. 엉성하고 미약한 약속이나마 남기고 간다. 내 그러마. 꼭 그러마.”
매창은 대답하지 않고 방문을 나섰다. 유희경도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헤어짐을 마주했을 때 사랑은 성스러운 자리에서 비정한 자리로 내려온다. 깨진 유리와 바늘과 칼날이 발바닥은 물론이고 심장까지 베지만 사랑에 절은 몸으로는 대적할 수 없다. 약하디약한 힘없는 짐승인 것이다. 매창은 방문에 기대서서 눈을 뜨지 못했다. 손이 묶이고 가슴이 쥐어뜯기며 유리를 밟고 서서 홀로 속울음을 운다. 속수무책이라는 말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울음소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을 찢을까 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며 속으로 운다. 이것이 한 사람의 몸에 붙은 자신의 생살을 찢어내는 이별이다. 그토록 뜨거웠던 사랑도, 이토록 아린 이별도 이승의 일은 아니리라. 미친 유령들이 벌이는 놀이임이 틀림없다.

떠들썩하던 집 안이 빈집처럼 휑했다. 전쟁 소식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만, 부안은 아직 무사했다. 한양과 영남 지방은 왜적의 분탕질로 백성들의 비명이 하늘에 닿는다는 소문을 전하는 사람의 얼굴도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낮에 여전히 해가 뜨고 밤에 어김없이 달이 뜨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의 진격로를 막았고 육지에서는 의병과 승군이 관군에 힘을 보태 전라도를 지켜냈다. 일본군은 단숨에 전주에 다다랐으나 곰티재 전투에서 병력 손실이 컸다. 권율이 지키고 있던 배티재 전투에서 큰 저항에 부딪혀 결국 무주로 퇴각했다. 이렇게 해서 전라도는 보존되었고 군량 공급처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믿기 힘든 소문도 있었다. 일본군이 곰티재에서 전사한 조선인들의 시체를 모아 길옆에 큰 무덤을 만들고 푯말을 세워주었다 한다.

“조선 사람의 충성스러운 마음과 의로운 용기를 위로한다.”

일본군마저 감동시킨 항전이었다지만 겁에 질린 백성들한테는 별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게 다였다. 잇달아 전해지는 소식은 패했다, 달아났다, 죽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이 밤에 손님이 올 리 없건만 그녀는 문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세웠다. 들리는 소리라곤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나 바람에 돌쩌귀 들썩이는 소리뿐이었다. 그녀는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인다. 그가 오지 않는다면? 그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면? 그 물음이 밤도깨비처럼 그녀를 찾아올 때면 조용히 책상머리에 앉는다. 정말 그렇다면 그녀가 지금 가진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랴. 적막한 밤은 길었다. 밤길을 쓸고 다니는 바람은 전쟁 중에도 운우지정을 나누는 남녀의 소리를 잘 숨겨줄 것이다.
그녀는 거문고를 꺼내 곡조를 연주하지는 못하고 줄만 엄지로 툭툭 퉁겨 보았다. 새 거문고라 자주 만져서 길을 내야 하지만 쳐다보거나 만져보기만 했다. 유희경은 떠나는 날 이별의 말도 없이 거문고와 편지 한 장만 아전 편에 전해왔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음악을 미학과 예술의 대상이라기보다 인격 수양과 사회 통합의 도구로 여겼지. 글 읽는 선비가 음악을 가까이하는 소이연일 것이다. 소리를 존재의 발현으로 생각하고 그 소리를 서로 알아주는 최고의 벗을 지음(知音)이라 불렀던 것도 그래서임을 너는 잘 알겠지. 음악을 사이에 두면 벗이든 남이든 서로에게 공명하는 마음을 전해준다는 믿음이 그리 터무니없는 것이 아님 또한 알지 않느냐?
나는 보잘것없는 사내이니라.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이 되어 네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 너를 생각하면서부터 두려운 것이 많아졌다. 하고 싶은 것도, 얻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더 잘난 사내가 되어 너를 얻고 싶다는 말, 많이 망설였다. 그러다 하지 못했다.
흔적이 없는 것,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이라면 뭐든 되고 싶다. 바람이든 물살이든 한숨이든 기침이든. 차마 헤어지는 너의 얼굴을 보지 못하겠구나. 작은 선물 하나 남겨두고 간다. 나인 듯이 여겨달라는 말은 못하겠다. 이 거문고가 네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나도 조금은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

감정을 덜어내고 덜어내 심지만 남긴 딱딱한 편지였다. 거문고 값이 그가 가진 돈을 다 털어야 할 만큼 비쌀 텐데. 그녀는 그 와중에도 그의 넉넉지 않은 형편을 걱정했다. 그의 말을 믿는다. 그는 여기 거문고로 남아 있는 것이다. 거문고를 만질 때마다 그의 자취가 느껴졌다. 더 큰 슬픔을 불러올 때도 있지만 곧 마음이 가라앉았다. 대용물의 역할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어찌 그렇게 그녀의 마음을 깊은 곳까지 살피는 것일까.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떤 때는 그가 곁에 있는 것 같아 옆을 돌아보기도 했다. 그것도 잠시뿐, 이내 그보다 몇 배나 깊고 어두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다.
부재의 실감이다. 육체의 부재이다. 마음을 두고 갔다 한들 몸이 이곳에 없으니 믿을 수 없었다. 매창은 여태까지 몰랐던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자신은 이것밖에 안 되는 여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하는 소견 좁은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 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을 그녀는 다하고 있었다. 구슬픈 한숨, 넋두리, 탄식. 어떤 일 앞에서도 의연하던 그녀는 어디로 갔나. 사랑과 이별. 그것만큼 달콤하면서도 그것만큼 매운 것도 없다.

‘우는소리 하지 마라.’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힘들다고 할 때마다 말했다. 그래도 불평을 멈추지 않으면 싸리나무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종아리에 피가 나고 그 피가 굳어 딱지가 앉으며 그녀 마음도 단단해졌다. 그녀에게 닥칠 미래를 알고 있었던 듯 아버지의 말은 효험이 있었다. 우는소리 할 때가 아니다. 마음을 인두로 판판하게 펴서 곧게 만들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열정을 쏟는 것도 힘이지만 열정을 삭여 담담해지는 것 또한 능력이었다.
매창은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일어나는 불안을 죽이려 애썼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을 붙잡고 가지런히 하려 해도 생각은 제멋대로 달아나 시작도 끝도 맺어지지 않았다. 이전에 자신이 어떻게 살았었는지, 무슨 힘으로 삶을 버텼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하루 일과를, 생활과 습관을, 무엇보다 마음의 길을 완전히 다시 만들어야 했다. 손톱이 뭉개지도록 땅을 파헤쳐 길을 뚫어야 한다. 작은 일은 아닐 것이다. 큰일도 아닐 것이다. 자신을 믿으면 되었다. 어렴풋이 길이 보이는 듯도 싶었다. 슬픔은 감출수록 진해지고, 분노는 누를수록 거세지며, 마음속의 빛은 드러내지 않을수록 밝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깊은 밤, 잠에서 깨면 좀처럼 다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왔다. 검은 하늘에 반달이 떠 있었다. 맑은 날이었다. 자연은 무정하다. 인간이 얼마나 아프든 기쁘든 슬프든 정확히 정해진 시간대로만 움직인다. 매창에겐 유희경도 저 달만큼이나 무정한 사람이었다. 자기 계획대로만 움직이는 사람.

‘만남은 짧고 헤어짐은 길군요. 만남은 진하고 달았지만 헤어짐은 오직 쓰고 쓰고 쓰기만 합니다. 저 지붕 너머 부서진 유리가루처럼 흩뿌려져 있는 별들을 당신도 보고 있나요?’


작가소개
1964년 전북 익산 출생
건국대 영문과, 연세대 국제대학원 졸업.
2001년 <한국소설>에 「기억의 집」으로 등단.
허균문학상, 구상문학상 젊은작가상 수상.
2014년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저서로는 소설집『식물의 내부』, 『스물다섯 개의 포옹』,
장편소설 『안녕, 추파춥스 키드』, 『위험중독자들』,
포토에세이집『On the road』, 에세이집『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것들』,
소설창작매뉴얼 『소설수업』, 번역서 『위대한 개츠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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