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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에는 한일 갈등 없다…한국축구 레전드, 일본에 쾌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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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전을 치른 일본 시즈오카 쿠사나기 종합경기장 라커룸에서 함께 포즈를 취한 한국축구 레전드 선발팀 멤버들 [사진 송지훈 기자]

한일전을 치른 일본 시즈오카 쿠사나기 종합경기장 라커룸에서 함께 포즈를 취한 한국축구 레전드 선발팀 멤버들 [사진 송지훈 기자]

1990년대 축구대표팀이 주축을 이룬 한국 레전드 선발팀이 일본에 쾌승을 거뒀다.

한국은 8일 오후 일본 시즈오카 쿠사나기종합경기장에서 열린 일본 선발팀과의 '2017 한·일 축구 레전드매치'에서 전반과 후반에 각각 두 골씩을 터뜨려 4-0으로 대승을 거뒀다. 향후 정기 개최를 추진 중인 친선경기의 첫 발을 기분 좋은 승리로 장식했다.

이 경기는 근래 들어 정치적인 이슈로 관계가 껄끄러운 양국 관계를 축구로 풀어보자는 의도를 담아 기획됐다. 대표급 스타 선수를 다수 배출해 일본에서 '축구의 고장'으로 불리는 시즈오카현(縣) 축구협회가 주관하고 한·일 양국 축구협회가 후원했다.

경기 전 한국 선수단 라커룸 분위기는 밝았다. "40~50대 중년 15명이 전·후반 각 40분씩을 소화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한 두 명쯤은 뛰다 쓰러질 것"이라는 신홍기(49) 전 전북 코치의 농담에 폭소가 터졌다. 유니폼을 받아든 뒤엔 "요즘 유니폼은 너무 달라붙는 스타일이라 입기 민망하다"는 볼멘소리가 줄을 이었다. 지휘봉을 잡은 김정남(73) OB축구회장이 "쓰러져도 좋으니 한 골만 먼저 넣으라"고 주문하자 선수들의 눈빛이 살아났다. 서정원(46) 수원 삼성 감독은 "현역 때도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일전을 앞둔 라커룸 분위기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무조건 이긴다'는 전제 조건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선수단 격려차 현장을 방문한 이석연 전 법제처장은 "한·일관계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스포츠는 정치적인 상황에 흔들릴 이유가 없다"면서 "한·일전은 오직 하나, 이기려는 열망이 강한 팀이 마지막에 웃는다"고 말했다.

날씨가 변수였다. 새해 들어 줄곧 맑던 시즈오카의 하늘이 공교롭게도 경기 당일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킥오프를 즈음해서는 장대비와 강풍이 번갈아가며 몰아쳤다. 경기 전 유상철 JTBC 해설위원은 "27명이 등록한 일본과 비교하면 우리 선수단(15명)은 절반 수준이다. 비까지 내리면 체력적으로 더 힘들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그라운드에 오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 선수들은 투혼을 불태웠다. 예전 같지 않은 체력에 힘들어하면서도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3000여 명의 일본 관중들과 호흡하며 뛰었다.

한국은 전반에 김도훈(46) 울산 현대 감독을 원톱으로 기용하는 4-3-3 포메이션을 가동했다. 이상윤(48) 건국대 감독과 서정원 감독이 좌우 날개를 맡았다. 삼각형 모양의 미드필드진은 윤정환(43) 세레소 오사카 감독, 김도근(44) 전 경남 FC 코치, 유상철 울산대 감독이 맡았다.

포백 수비진은 왼쪽부터 신홍기 전 코치와 최영일(51) 전 동아대 감독, 최진철(46) 전 포항 스틸러스 감독, 최성용(41) 수원 삼성 코치가 맡았다. 김병지(46) SPOTV 해설위원이 수문장으로 나섰다.

한국은 전반에 두 골을 먼저 성공시키며 리드를 잡았다. 이상윤 감독의 크로스를 정면에 있던 김도훈 감독이 머리로 받아넣어 선제골을 뽑았고, 전반 중반 이후 최성용 코치가 상대 수비수의 클리어링 실수를 그림 같은 오른발 논스톱 발리 슈팅으로 연결해 또 한 번 골망을 흔들었다.

후반에는 오노 신지(38·콘사돌레 삿포로)를 비롯해 젊은 선수들이 대거 출전한 일본을 맞아 수비 위주의 경기 운영을 했다. 아울러 정재권(47) 한양대 감독을 비롯해 송종국(38) MBC해설위원, 최태욱(36) 서울 이랜드 유소년팀 감독, 현영민(38) 전남 드래곤즈 플레잉코치 등 젊은피 중심으로 경기를 운영했다. 상대의 공격을 적절히 차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역습으로 두 골을 보탰다. K리그 득점왕 출신의 임근재(48) 대신중 감독이 멀티골을 터뜨리며 대승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2008년 대한축구협회 창립 75주년 기념 경기 이후 9년 만에 부활한 한·일 레전드 매치를 성사시키기 위해 축구계 안팎의 응원과 지원이 이어졌다. 대한축구협회는 선수단에 유니폼과 트레이닝복, 가방을 제공했다. 국내 스포츠용품업체 애플라인드도 이너웨어와 트레이닝복을 전달하며 응원했다. 김병지 위원은 "선수단이 받은 소액의 출전수당 중 일부를 모아 650만원 정도를 만들었다. 여러 선·후배들과 뜻을 모아 이 돈을 유소년 축구발전기금으로 기부할 예정이다. 우리가 받은 응원과 격려를 사회에 환원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한·일 레전드매치를 기획한 우에지 조타로 일본올림픽위원회 국제위원은 "최근 두 나라는 정치적인 이슈로 첨예하게 갈등하지만 경기장에서는 모두가 화목하고 행복했다"면서 "이 행사가 더 늦어지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다. 레전드매치를 한·일 소통의 창구로 키워가고 싶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북한까지 참여시키는 방안도 고려하겠다"고 말했다.

시즈오카=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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