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천년학’ 의 울음 ‘서편제’ 소리보다 가슴 저밀 겁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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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70) 감독의 100번째 작품 '천년학'이 날개를 추스르고 새봄 훨훨 날아오를 태세다.
지난 연말 투자유치 문제로 날개를 접는 게 아닌가 우려가 일었던 것도 잠시. 신생 제작사 키노투가 나서 새 투자자를 확보해 올 봄 촬영에 들어간다. '천년학'은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소리꾼 아버지 밑에서 남매로 자란 두 남녀가 20년 세월을 두고 사랑을 이어가는 얘기다. '서편제'와 함께 소설가 이청준(67)씨의 연작 '남도 사람'에 실려 있는 단편 '선학동 나그네'가 원작이다.
임 감독은 "'서편제'가 소리가 중심인 영화였다면 '천년학'은 두 남녀의 지극한 사랑에 온 힘을 모아볼 것"이라며 "저로서는 사랑 얘기는 처음"이라고 밝혔다. 원작자 이청준씨는 이번에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가로도 참여한다. 경기도의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인 점을 기회로, 수시로 머리를 맞대고 '천년학'의 비상을 준비 중인 두 사람을 만났다. 향긋한 다향과 함께 '천년학'을 택한 이유부터 시작했다. 만남이 무르익으면서 탁자 위의 음료는 곡차로 바뀌었다.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은 올 봄 매화 만개한 광양에서 촬영을 시작한다. 원작자 이청준씨는 시나리오 작가로도 이번 작품에 참여한다. [사진=안성식 기자]

임권택='선학동 나그네'는 사실 '서편제'(1993년)를 만들던 때부터 영화화하고 싶었던 얘기예요. 그때 연작소설 세 편 가운데 '서편제''소리의 빛', 이 둘로 '서편제'를 만들었어요. 당시'선학동 나그네'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영상으로 만들 자신이 없었지요. 나중에 '춘향뎐''취화선'에 컴퓨터 그래픽을 제법 많이 썼는데, 그걸 눈치채는 사람이 별로 없더군요. 이 정도 기술이면 되지 않을까, 하면서 이번에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들을 데리고 원작의 무대를 돌아봤습니다. 할 수 있겠다고들 하더라고요. 자신이 생겼죠. '서편제'이후 13년 동안 제 안에서 발효된 것도 있고.

임권택
서편제와 달리 소리보다는
애틋한 사랑에 중점 둘 거예요
몽환적 분위기 위해
컴퓨터 그래픽도 쓸 거고요
난 신인과 궁합이 맞나봐요

이청준=원작의 무대는 전남 장흥의 제 고향 마을에서 고개 하나 넘으면 되는 곳입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논이 됐지만 예전엔 긴 포구가 뻗어 들어와 있고 기이한 모습의 산줄기가 둘러쳐져 있었어요. 밀물 때 포구 안쪽으로 물이 들어오면 산이 학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물에 비친다고들 했죠. 어릴 때는 몰랐는데, 어른이 되고 70년대 후반 고향을 찾았을 때야 그 모습이 비로소 보이더군요. 상상력의 눈이 성숙하지 않으면 안 보이는 것이었어요. 그 덕분에 이미 발표한 '서편제'(76년)에 이어 '선학동…'(79년)을 쓰게 됐죠.

임='서편제'는 영상의 힘으로 소리가 눈에 보이도록 찍자는 것이 초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소리보다는 오누이의 비극적이고 애틋한 사랑에 중점을 두려고 합니다. '눈먼 소리꾼 누이, 소리가 싫어 북채를 놓고 도망간 남동생'이라는 설정은 전편을 이어받고 있습니다만,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소리로 승화되는 모습을 그릴 겁니다. 눈먼 소리꾼 누나에게 제대로 된 북재비가 붙을 리가 없으니, 동생이 사랑 때문에 다시 북채를 쥐게 되는 거죠.

이=문학에서 하는 얘기로, 비극에도 구원의 씨앗이 있다고들 하지요. 오누이가 모두 소리를 업으로 삼고 있는 만큼, 이네들의 사랑엔 소리가 구원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임 감독은 '천년학'의 음악에 대해 "많이 알려진 소리를 쓸 것"이라고 할 뿐 말을 아끼려고 했다. "소리가 나온다는 점은 같지만 '서편제'와는 전혀 다른 새 작품이 될 것"이라는 이청준씨의 부추김 덕에야 조금 더 구체적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미리 다 공개할 수는 없지만, 귀에 익은 소리와 극의 흐름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경지가 빚어지리란 기대가 생겼다.

이청준
밀물 때 산이 학으로 변하는
작은 포구가 원작의 무대죠
비극에 구원의 씨앗이 있듯
이네들 사랑엔
소리가 구원 역할을 합니다

임=가령 옥에 갇힌 춘향이가 이도령을 따라 서울로 가고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 영화에서 오누이가 서로 절절히 보고 싶어 하는 마음과 어울릴 겁니다. 다른 음악은 현대음악을 한 양방언씨가 맡습니다. 우리 소리와 전혀 거슬리지 않는 음악으로요. 북은 고수(鼓手) 중에 최고라는 김청만씨가 합니다. 주연배우인 김영민씨도 두 달째 북을 배우고 있어요.

이=임 감독 영화는 이런 재미가 있어요. 이번에는 어떤 신인을 기용할까 하는.

임=김영민씨는 연극계에서 꽤 알아주는 연기자입니다. 온몸에서 슬픔이 배어나고, 한을 발산하는 것이 어느 기성배우보다 잘 골랐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편제''장군의 아들'처럼 신인들과 일하면 흥행이 잘되는 것 같습니다.

이=소설의 역사라는 게 실은 인물 창조의 역사입니다. 반면 영화는 한 편마다 주인공이라는 인물뿐 아니라 새로운 배우를 창조해 내기도 하는 작업이죠.

임=저도 스타가 필요하면 쓰지만,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으면 기왕에 하나라도 배우를 키워내자는 생각입니다. 스타를 기용 안 해서 제 영화에 투자를 못하겠다는 일이 처음이라 조금 난처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한 번의 장애가 외려 좋았던 것 같습니다. 시간을 벌었죠. 해외영화제의 기대도 있고 해서 겨울 동안 급하게 찍으려던 것을 이제 사계절을 다 담게 됐습니다.

'천년학'은 매화 꽃잎이 흐드러질 무렵의 전남 광양을 시작으로, 진도.장흥 등에 짓는 세트를 중심으로 촬영할 예정이다. 임 감독은 "원작이 남도만 헤매고 다니는 바람에 서울서 찍을 일이 없다"는 농담으로 이청준씨의 고향을 타박했다. 임 감독의 고향은 장성. 남도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이지만 "갯가(장흥)와 달리 장성은 그 시절에 이미 기차.전기가 들어왔다"고 선을 그어 듣는 이를 웃겼다. 이청준씨라고 할 말이 없을 리 없다. 촬영진행과 나란히 시나리오를 완성시켜 가는 임 감독의 작업방식을 상기시키면서 "꼼짝없이 현장마다 불려다니게 생겼다"고 엄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녹록지 않은 작업을 앞두고 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여유 덕에 봄바람이 미리 다녀가는 듯했다.

용인=이후남.주정완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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