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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인 더 룸 #7

중앙일보

입력

_ 2막

"오션 시네마입니다“

"극장이죠? 지금 하고 있는 영화가 뭐죠?“

"미스 카프카입니다."

전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암컷 벌레와 성교하는 장면을 상상했으려나. 순간 히터에 발가락이 데인 줄 알았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뜨거워 얼른 발을 옮겼다.
네 시 오 분 전. 그러니까 다음 상영까지는 1시간 정도 남았다. 별 의미는 없다.

내가 하는 일은 매표구 안으로 들어오는 현찰을 받고, 거스름돈과 영화 표를 내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손때 묻은 장부에 인원수를 체크한다. 열 석을 넘기는 일은 드물지만, 관객이 어두운 극장 안에 벌여놓고 간 흔적을 정리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왜냐하면, 목이 길고 모서리가 찌그러진 스테인리스 재떨이가 있어도 바닥에 침을 뱉어놓는 데다, 운이 안 좋은 날엔 의자에 묻은 정액 흔적을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별 의미는 없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실패를 불러옵니다. 얼음 위에선 그냥 미끄러지는 게 최선이죠. 오늘은 함박눈이 내린다는 소식이 있네요. 여러분 퇴근길 운전 조심하세요. TRB 교통정보를 마칩니다."

기계음 같은 리포터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딱히 눈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눈 소식에 잠깐이라도 바람이 쐬고 싶었다. 경쾌한 BGM이 끝날 때 슬리퍼를 끌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극장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훅 밀려들어 왔다. 남방 하나만 걸치고 나온 것을 약간 후회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건물이 지어진 지는 어림잡아 30년이 넘었다. 계단은 들쑥날쑥 높이가 맞지 않고, 언제 덧칠한 지 알 수 없는 하얀 벽엔 커피나 음료수 튄 자국이 선명하다. 마치 싸우다 튄 핏자국이 굳어진 것처럼 보였다. 복도에는 프랑스 건축 배경의 먼지가 잔뜩 낀 유화가 생뚱맞게 벽에 걸려있었다. 이것은 입구에 널려있는 포스터처럼 극장을 더 가치 없어 보이게 만들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하얀 벽에 튄 얼룩을 부지런히 닦았지만, 언제부턴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극장의 매출도, 사람들의 태도도 바뀌지 않는다. 눈은 아직이다. 하늘이 낮은 거로 보아 곧 도시의 밤이 함박눈에 덮이겠다. 노래방과 공인중개사, 한약재상 간판 위로 보이는 헐벗은 여자의 나신. 극장 입구에는 상영하는 영화의 포스터 붙어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화장을 한 남녀 중학생들이 입구에서 간판을 쳐다보곤 키득거린다. 담배 두 개비를 급하게 태우고, 아이들의 비웃음을 뒤로 한 채 극장 쪽으로 다시 천천히 몸을 틀었다.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생소한 소리가 들렸다. 먼지가 잔뜩 낀 형광등 주변에서 벌새가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날아들어 온 걸까? 출구를 찾지 못하면 극장 어딘가에서 겨우내 말라비틀어질 텐데. 찬 공기 때문인지 마디 하나가 사라진 세 번째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매표서 안으로 들어오자 극장 입구 쪽에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여자가 보였다. 손만 오가는 창구에 고개를 붙이고 내다보니 여자 하나가 두리번거리고는 돌아선다. 봄에 걸치면 화사해 보일 얇은 주황색 카디건을 입고 팔로 몸을 감싼 채 배회하고 있었다. 간간이 입구의 포스터를 시시덕거리며 지나가는 여자들을 본 적은 있지만, 2층 매표구까지 올라오는 여자는 드물다. 미친 여자? 몸 파는 여자? 거지인가? 손님에게 몸값을 흥정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문뜩 그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이모라고 불렀던 여자도, 그리고 연화. 까마득한 사춘기 시절,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악몽 같았다.


*

"안에 있나?“

"네? 무슨 일이세요?“

".......“

"잠깐 나와보게..."

주인집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잠이 든 줄 알았던 어머니는 낫처럼 ㄴ자로 일어나 앉았다. 나는 눈을 꼭 감고 자는 시늉을 했다. 어머니가 문 닫는 소리가 들린 후 돌아누워 빛이 들지 않는 방안을 오랫동안 훑어보았다. 문 옆에 걸려있는 감색 교복, 거꾸로 얼굴을 처박고 있는 유리병의 질퍽한 하얀 로션과 얼굴을 흰 쌀알처럼 변하게 하는 분첩, 앉은뱅이 화장대, 그리고 모서리가 해진 여름 이불 한 채가 개어있는, 내 나이보다 오래되어 보이는 서랍장. 한 시간쯤 지났나 보다. 인기척을 듣고 나갔던 어머니는 작은 화장대 앞에서 헝클어진 긴 머리칼을 빗으로 몇 번 쓸어내리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실눈을 뜨고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내가 잠들었는지 몇 번씩을 확인했던 어머니는 이제 내 눈치를 보지 않았다. 내 키가 커질수록 방은 비좁아졌고 어머니는 편히 눕지 못했다. 어머니의 눈은 지쳐있었지만, 어느 날부터는 하얀 광채가 배어있었다. 어머니는 전에 본 적 없던 금가락지를 꺼내 손가락에 껴보고는 몇 번을 만졌다. 어머니의 손가락은 복스러운 얼굴과 다르게 주름이 많았다. 번쩍거리는 손을 한참 바라보더니 잠시 뒤 어머니는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선선한 가을날인데도 어머니의 몸은 뜨거웠다. 포마드 기름 냄새가 은은하게 밀려왔다. 곯아떨어진 어머니는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어머니는 일절 하지 않았다. 이 집 식구 누구도 아버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내 밥상에 고깃국이 올라온 것은 그날 이후였다.

주인집 할아버지는 늘 두루마기 한복, 머리엔 포마드 기름을 잔뜩 발라 넘기고서 종일 손님들과 화투판을 벌이는 것이 일이었다. 연화의 아버지인 포목점 아저씨, 그리고 내가 이모라고 부르던 여자. 주인집 할아버지의 자식은 이렇게 둘이었다. 포목점 아저씨는 이 집에서 조금 떨어진 한옥에 살고 있었다. 내가 이모라고 부르던, 지적 장애를 갖고 있던 여자는 목 왼쪽에 이상하리만치 검고 큰 점이 있었고, 헤벌쭉하고 항상 웃었다. 그 점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태생적으로 기분이 좋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때는 빠른 화면처럼 움직였다. 특히 밥을 먹을 때 그랬다. 검은 점이 블랙홀처럼 밥을 빨아드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모의 점은 점점 커졌다. 점이 이모를 조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당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을 때는 이모 곁에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이모가 종일 실종되어 동네 사람들이 온종일 찾아 헤맨 적이 있었는데, 비실비실 웃으며 이모는 돌아왔고 그날 이후로 집사 아저씨나 나를 볼 때면 웃을 때 입술에서 투명한 달팽이 같은 침이 고였다.

나는 집사 아저씨가 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아저씨를 따랐다. 집사 아저씨는 쌀 한 마지기도 한 손으로 거뜬히 들었다. 이 집에서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었다. 대문 바깥에서 아이들 노는 모습만 지켜보고 있을 때는 대나무를 쪼개 썰매를 만들어주었다. 학교에서 아버지 얼굴을 그리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집사 아저씨를 그렸다. 집사의 부인과 집사 아저씨는 다정했지만 꿈에 집사 부인이 죽고 어머니와 셋이 사는 꿈을 꾸었다. 혹시 집사 부부가 내 부모는 아닐까, 어머니와 집사 아저씨가 이야기라도 하면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야밤에 외출했던 어머니는 다음날 새벽에도 일어나 쌀을 씻고 국을 끓였다. 점심을 차리기 전에는 다시 마룻바닥을 걸레질하고 빨래터로 향했다. 일주일쯤 뒤에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문에서 기척이 들리자 어머니는 치장하고 잠시 뒤 서재로 걸어갔다. 어머니의 얼굴은 하얘졌고 피곤해하면서도 생기가 느껴졌다. 서재에 다녀온 뒤에는 주인 할아버지의 포마드 기름 냄새가 방안에 가득 찼다. 그 후로 보름 동안 문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깥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까지 기어가 내다보았다. 어머니 나이 서른셋일 때였다. 점잖은 늙은이가 점점 징그럽게 느껴졌다.

어머니와 집사 부부, 그리고 나는 주인집 가족의 식사가 끝나면 살이 하나도 없는 생선과 이모가 손으로 헤집어놓은 나물 그릇, 남은 찬과 국으로 밥을 먹었다.

"으아 아아아 으아아."

마당을 미친 듯 이모가 내달리고 있었다. 세숫대야를 걷어찼고, 오늘은 작은 장독을 하나 부쉈다. 바깥에 나가지 않고 며칠 집에서만 갇혀 있으면 이모는 괴성을 지르며 맨발로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입으로 사람을 부리는 주인 할머니는 풍선처럼 몸이 불기 시작했고, 거동이 불편해 이모를 산책시킬 수 없었다. 한번 발작을 시작하면 열 살짜리 사내아이처럼 혈기가 넘치는 이모는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이모도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몇 달은 어머니를 따라 신나게 장을 구경했지만, 어느 날 어머니가 채솟값을 흥정하며 한눈판 사이 이모는 낯선 남자를 쫓아갔다.

"사모님, 사모님 아이고 어째요. 아가씨가 사라지셨어요. 당장 사람 시켜서 아가씨를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뭐라고? 어디서? 정신을 어디에 팔고 다니는 거야?“

"장에서 채솟값을 치르는데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럼 찾아서 데려와야지, 왜 혼자 기어들어 와?"

동네를 수소문해 그날 저녁 이모는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장에서 사 온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지도 못한 채 따귀를 맞았다. 연화를 데리러 온 연화 엄마는 그 장면을 보았고,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어머니에게 하대하며 주인 할머니를 거들었다. 나는 방안에 숨죽이고 그 소리를 들었지만,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집사 아저씨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를 거들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모를 찾을 때까지 마당에 서서 꼼짝을 못하던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와 다리를 부들부들 떨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검은색 치맛단 위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날도 잔인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일어나지 않았다. 삽 십 분 정도 지나자 어머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나는 나가려는 어머니를 붙잡고 싶었다. 새벽이 다 되어서 방으로 돌아와 내 옆에 누웠다. 꼿꼿하게 천장을 보고 누워있는 어머니는 아침까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이 집구석은 나에게 지옥 같았다. 어머니와 나의 편은 없었다. 악랄한 연화 년을 학교에서 보는 것도 끔찍했다.

연화는 주인집 할아버지의 손녀딸이었다. 중학교에서 나와 같은 반이었는데, 제 엄마를 닮아 콧대가 아주 높았고 무리를 지어 대장 행세를 하곤 했다. 말수가 적고 사교적이지 못한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얄미워 죽이고 싶던 적도 있었다. 하루는 연화가 나를 앞서 대문을 넘어서다 발을 헛디뎠고 얼른 달려가 연화의 팔을 잡았다.

"연화야, 괜찮아?“

"놔."

화들짝 놀라서 팔을 놓쳤다. 나쁜 짓이라도 하려다가 들킨 듯한 기분이었다. 약한 계집애인 주제에. 연화는 주인집 안채로 들어갔고 나는 쪽문을 열고 문간방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밥을 먹고 서둘러 학교에 가려는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 손짓을 하고 있었다. 덜떨어진 이모의 산책은 내 몫이 되었다. 학교 성적보다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모는 산책을 나서면 나를 떠나지 않았다. 동네 꼬마들이 이모에게 '미친년아! 병신년아!' 하고 돌을 던지자 겁이 났던 모양이다. 꼬마 녀석들에게 달려가 귓불을 세게 잡아당기며 얼씬 못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이모가 다치면 어머니에게 어떤 화가 생길지도 몰랐기에 필사적으로 이모를 보호했다. 어제도 지긋지긋한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을 잘 수 없었다. 새벽이 다 되어서 어머니가 지친 얼굴로 방문을 열었을 때 눈이 마주쳤고 못 본 척 눈을 질끔 감았다. 어머니에게 학교에 안 다녀도 좋으니 이 집에서 나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이모에게서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다짐을 하고 개울가에 나왔다. 여름 날씨가 무더웠고 며칠 잠을 설쳤더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잠시만 쉬어야지 하고 나무 그늘에 앉았지만, 몸이 녹을 것 같은 햇볕과 나무 그늘에 내 눈을 스르르 감겼다.

낮잠에서 깼을 때는 환각이 일어난 듯 울긋불긋 흐드러진 꽃 사이로 벌새가 바삐 움직였다. 하늘에 박힌 해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듯 주변이 눈부셨다. 눈을 뜰 수 없었다. 뜨거운 탕 속에 붕붕 떠 있는 듯했다. 우짖는 벌새의 소리가 사라지자 숨찬 괴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비린 개울물이 뚝뚝 내 몸 위로 떨어졌고 물에 젖어 속살이 훤히 드러난 이모가 보였다. 억억 소리를 내며 눈을 하늘로 치켜뜨고 있었다. 찬 물방울이 배 위에 떨어져도 성기는 가열된 듯 뜨거웠다. 밀어내고 싶었지만 뜨거워진 성기의 감각은 몸을 경직시켰다. 손을 뻗어 짐승 같은 소리를 내는 이모 허리를 세게 붙잡았다. 그때 이모의 얼굴 위로 주인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였고 그다음엔 주인 할머니의 얼굴이 스쳤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주인 할아버지의 아래서 가락지를 매만지며 벌거벗은 어머니의 얼굴이 스쳤다. 번데기에서 부화한 나비는 무지개 빛깔이 아닌, 정박아의 괴성, 늙고 추악한 노인의 욕망이 새겨졌다. 머릿속이 붕 뜨다가 이내 멍해졌고 하체의 감각만 선명했다. 눈부신 햇살이 지긋지긋해졌다. 입에서 "까악!" 하고 괴성이 터지자 수치스러운 욕정이 왈칵 분출되었다.

세상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였다. 바람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바람은 알고 있을까.


작가 소개  
조금 어린 나이의 결혼 그리고 빠른 나이의 이혼, 통신회사, 콜센터, 어학원 운영 중 경영악화로 빈털터리가 됨. 2년간 낙오자라는 패배감으로 자폐적인 시간을 보내던 중 무작정 세계 여행을 시작. 1년 정도 해외 여행 중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 성을 사회적, 문화적으로 조망하는 시와 수필을 SNS에 연재 중이다.

<아스팔트에 핀 꽃> 동인 시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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