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여기서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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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시장경제원리를 떠받쳐 주는 두개의 기둥은 바로 자율과 경쟁이다.
스스로 결정한 바에 따라 공평하게 겨루는 것이다.
그래야 경제는 튼튼하게 단련되고 또 그 결과에 대해 모두가 승복하며 뒤끝이 없다.
우리와 같이 뒤늦게 출발하여 숨가쁘게 달려온 경제에서는 특히 그 같은 「공정한 경쟁」이 늘 문제가 되어왔다.
지난 81년에야 겨우 공정거래법이라는 제도적 틀이 처음으로 만들어졌을 정도이니, 그때까지 우리 경제에서의 경쟁은 좀 과장하여 표현한다면「무법지대」에서의 경쟁이었다고 몰아붙여도 할말이 없게 되어있다.
그러나 비록 공정거래법이 생겨 경제에서의 경기규칙을 어기는 선수들에게「옐로 카드」를 뽑아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업끼리의 경쟁에 대한 얘기다.
바꿔 말하면 공정거래법은 어디까지나 행정의 힘으로 기업끼리의 질서를 잡아주는 것이지 행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여전히 무법지대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경제는 최근까지도 행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터져나온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정치 못한 경쟁을 분명히 겪었고 또 그 대가를 톡톡이 치렀다.
또 행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란 대부분 정치권력의 영역이게 마련이므로 그 같은 일이 드러날 때마다 사회와 정국은 큰 파문에 휩쓸렸고, 공정한 경쟁이라는 시장경제원리를 확립하기 위한 「정치권력의 질서」가 그토록 절실할 수가 없었다.
바로 이름하여 권력형 특혜-.
권력층이 직접 개입된 가장 최근의 사건으로서는 정내혁사건을 들 수 있고, 그 보다 훨씬 큰 규모로 국민경제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이 이철희·장영자부부의 거액어음사기사건과 명성그룹의 수기통장사건이었다.
권력층의 부정축재가 흔히 각종 이권개입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이·장부부는 그들의 배경과 전력을 과시함으로써 대기업과 은행을 주무를 수 있었고, 명성의 김철호회장도 권력층과의 친분관계를 은연중에 드러내 보임으로써 사업확장을 위한 관으로부터의 인·허가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경제질서를 해치는 권력형 특혜의 뿌리는 오래고도 깊다.
52년 4백만 달러의 정치자금이 오간 중석불사건, 56년 국회외교분과위원장이 개입된 국제시계밀수사건, 74년의 박영복 부정대출사건등은 정권은 바뀌어도 특혜성 「정경거래」는 계속되었다는 것을 마디마디 짚어주는 경제사건들이다.
그러나 정작 권력형 특혜는 위와 같은 1회성 「사건」만으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데에 더 큰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후진국에 있어서의 독과점은 경쟁의 결과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권력기관의 보호에 의해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관료조직의 행정적 의사결정이 시장기구를 통한 자원의 배분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폐단이 독과점이기 때문이다. 독점이나 중앙집권적인 정부형태는 시장경제의 질서와 양립할 수 없다.』서울대 조정교수의 이 같은 지적은 어디까지나 일반론이지만 실제로 우리재계의 초기성장이 50년대의 귀속재산 불하와 원조물자, 60년대의 재정투융자와 차관도입과정을 거치면서 「특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권력형 특혜의 그같은「구조적 폐해」는 요즈음도 여전하다.
최근의 부실기업정리에 골머리를 앓았던 한 당국자의 하소연에 가까운 토로를 들어보자. 『해운부실의 간판격이었던 A사를 봅시다. 78년부터 정부가 해운업을 장려하기 시작했을때 해운업에의 진출권은 상당한 이권이었지요. 당시 A사는 정치적 이유로 인해 기존의 소유주 K씨로부터 권력층의 인척에게로 넘어가면서 이름을 바꿨읍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거대한 부실더미인데 그 부실을 제3자에게 인수시키는 과정에서 또다시 특혜시비가 일더군요. 정부가 해운업을 장려한 것도, A사와 같은 특혜인수를 시킨것도 분명히 잘못입니다. 그러나 A사의 제3자 인수는 결코 특혜가 아니었읍니다.』 이 당국자의 말에서 우리는 권력형 특혜가 우리의 정치·사회·경제에 끼치는 구조적 폐해의 전형을 읽을 수가 있다.
곧 경쟁의 룰을 깨는 정부의 개입과 거기에 깃들이는 권력형 특혜는 필연코 경제력집중이나 부실기업등의 엄청나게 비싼 국민경제적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으며, 정치·사회적으로는 서로의 정당함을 의심하는 뿌리깊은 불신을 낳는다는 것이다.
최근 별로 사정이 좋지 않은 한 건설회사의 사주가 여권실력자와 사돈을 맺을 것이라는 사실무근의 루머에 그 회사의 주식값이 당장 치솟았던 일은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 「권력에의 믿음」이 얼마나 심각한 불신을 낳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 같은 불신이 널려있는 한 경쟁의 질서는 잡힐 수 없으며 이는 경제의 선진화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장애가 된다.
『역시 근본적으로는 자원배분에의 정부간섭을 최소한으로 줄여 권한이 끼어들 여지 자체를 줄여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정보의 신속하고 정확하며 광범위한 전달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정보의 독점은 특혜와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한국개발연구원 이규억 선임연구위원의 이 같은 지적은 권력형 특혜를 없애기 위한 제도적인 대안이다.
그러나 제도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권력형 특혜다. 바로 윤리의 확립과 국민적 고발정신의 문제인 것이다.
경제나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은 가능한 한 점진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권력형 특혜의 추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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