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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좋아진다 믿으면 좋아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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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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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클레이 셔키(뉴욕대 교수)는 소셜미디어 전도사로 불린다. 그는 2008년 광우병 촛불을 든 십대 소녀들에 주목했다. 그들은 왜 광우병 시위에 열광했을까. 셔키는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에서 답을 찾았다. 소녀들이 ‘동방신기 때문에 참여했다’고 봤다. 팬 사이트의 게시판에서 광우병 정보를 접한 뒤 ‘침묵하는 소비자’에서 ‘시끄러운 생산자’로 변했다는 것이다. “SNS는 사람을 쉽게, 많이 모은다. 많아지면 달라진다. 인간은 소통을 통해 사회를 만들어 나간다. 소통의 방식이 바뀌면 사회가 바뀐다.” 셔키는 몇 년 전 쓴 책 『많아지면 달라진다』에서 광화문에 모인 동방신기의 소녀팬들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나빠진다면 진짜 나빠지는
‘자기 실현적 위기’ 막아야

‘많아지면 달라진다(More is different)’는 물리학자 필립 앤더슨이 40년 전 한 말이다. 각각의 사물을 아주 많이 합해 놓으면 그 집단은 새로운 행동 방식을 보인다는 것이다. 물리 법칙은 인간의 법칙을 뛰어넘는다. 그러니 인간이 만들어낸 경제 법칙쯤이야 가볍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경제가 나빠질 것이라고 믿으면 진짜 나빠진다는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같은 것 말이다.

언젠가부터 한국 경제를 안 좋게 보는 사람이 늘고 있다. 바깥보다 우리 안에서 더 비관의 목소리가 높다. 올해는 특히 그렇다. 며칠 전 LG경제연구원의 설문 조사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올해 한국 경제가 작년보다 나빠질 것이란 응답이 64%였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란 응답은 고작 7%였다. 경제 전문가들은 더하다. 학자·관료 할 것 없이 ‘위기’를 말한다. 20년 전 외환위기에 빗대는 이들도 많다. ‘그때보다 나쁘다’ ‘사방이 막혔다’ ‘해법이 없다’며 비관을 넘어 절망 일색이다. 올해가 외환위기 20년이 되는 해라 더 그럴 것이다. 과연 그런가. 외환위기 하면 떠오르는 이름 이헌재(전 경제부총리)와 김석동(전 금융위원장)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장관과 대책반장으로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했지만 한국 경제의 앞날을 보는 눈은 사뭇 달랐다.

김석동은 지금 한국 경제의 어려움을 세계 경제의 구조적 문제로 봤다. “(대공황 이후) 빚의 경제가 만든 40년 세계 경제 호황은 끝났다. 앞으로 40년은 거품 붕괴의 폭풍이 불 것이다. 섣불리 밖으로 나가면 죽는다. 안을 튼튼하게 해야 한다. 구조개혁과 혁신만이 살길이다.” 그는 “이제 나빠질 일밖에 없다”며 “성장률에 집착 말라. 정부는 (경제가) 나빠진다고 솔직히 고백하라. (국민에게) 허리띠 졸라매시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이헌재의 시각은 다르다. 그는 “지금 경제위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당시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경제 문제는 (병으로 치면) 대부분 만성질환이다. 가계부채 1300조원? 큰 문제지만, 당장 죽지 않는다. 아주 비상시국이면 ‘채무 동결’ 같은 응급수단을 쓸 수도 있다”고 했다. “실업과 서민 대책에 집중하면 시간을 벌 수 있다. 탄핵 정국을 경제 체질을 바꾸는 데 쓰면 해결된다”고 조언도 했다. 지금 경제의 어려움은 낡은 틀을 바꾸지 않아서 생긴 병으로 봤다. 그는 5년 전에도 “박정희 모델로는 더 이상 안 된다”고 말해 왔다.

누구 말이 맞나. 따질 일은 아니다. 어디서 어떻게 봤나의 차이일 뿐이다. 진단은 다르지만 묘하게 해법은 같다. 구조개혁, 곧 체질 개선이다. 해법이 있다면 병이 아주 깊은 것은 아니다. 완치도 가능하다. 지레 겁먹고 치료를 포기해선 안 된다.

어제까지 절망에 빠져 있었다면 오늘은 희망을 말하고 싶다. 마침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며칠 전 기자들과 만나 “언론이 도와 달라. 경제 나빠진다는 얘기는 그만해 달라”고 말했다. “죽는다 죽는다 하면 진짜 죽고, 좋아진다 좋아진다 하면 진짜 좋아지는 게 경제”라며 “경제가 좋아진다고 믿는 사람이 늘어나면 진짜 좋아질 것”이란 말도 했다. 그렇다. 많아지면 달라진다. 올해 광화문의 촛불이, 대한민국 경제가 믿는 것도 이것일 것이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