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명품 '박정자 브랜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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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정자(左)보다 ‘복 많은’ 여배우가 있을까. 젊은 청년과 해마다 사랑을 나눌 수 있으니 말이다.

연극배우 박정자(64)씨는 한국 연극사에 이렇게 기록될지도 모르겠다. '자기 이름을 브랜드로 연극을 올린 최초의 배우.'

'19 그리고 80' 이란 연극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연극이 왜 '박정자 브랜드'일까. 그녀가 연출자와 상대 배우를 바꿔 가며 해마다 무대에 올리기 때문이다. 지난해 거르긴 했지만 벌써 4년째다. 또한 '19 그리고 80'은 김지숙의 '로젤'이나 손숙의 '셜리 발렌타인'처럼 1인극도 아니다. 연출자나 작가가 아닌 배우가 중심이 돼 고정 레퍼토리 시스템을 구축하기는 박씨가 처음이다. 게다가 공연 첫 시작도 '19'를 상징하기 위해 매년 1월9일로 잡았다. 이래 저래 박정자의, 박정자에 의한, 박정자를 위한 연극일 수밖에 없다.

연극 '19 그리고 80'(연출 강영걸)이 올해도 1월 9일부터 공연에 돌입했다. 서울 청담동 우림 청담 씨어터에서다. PMC 여배우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번 무대엔 특히 상대 해롤드역이 '88올림픽 굴렁쇠 소년' 윤태웅(25)이라 더욱 화제가 됐다. 윤씨로선 데뷔 무대다.

자살을 꿈꾸는, 삶에 별다른 애착이 없는 19살 해롤드가 80살의 노파 모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다는 게 전체적인 줄거리다. '해롤드와 모드'란 원제처럼 원작엔 두 사람의 비중이 엇비슷하다. 그러나 국내로 들어와 '19 그리고 80'으로 바뀌면서 무게 중심은 철저히 모드에게 쏠린다. '박정자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무대에도 박정자의 연기는 여전했다. 다소 천방지축인 듯 보이면서도 순수한, 그러면서도 삶의 한 부분을 처연하게 응시하는 관조성을 그녀는 제대로 살렸다. 그렇다면 윤태웅은? 첫술에 배부르랴만 힘겨움이 역력했다. 감정 처리도 어색했다. 따지고 보면 윤태웅뿐이 아니다. 역대로 해롤드역을 했던 1대 이종혁과 2대 김영민 역시 해롤드를 소화하기엔 항상 버거웠다. 박정자의 카리스마에 눌린 탓일까.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제대로 기를 못 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삐걱거림이 '19 그리고 80'의 생명력일지도 모른다. 박씨는 "진짜 80이 될때까지 이 연극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해마다 새파란 청년을 데려다 그를 성장시키는 재미로 그녀는 연극을 할지도 모른다. '똑 떨어지는 해롤드가 언제 나올까'를 기대하며 이 연극을 기다리는 관객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때론 완벽함보다 조금 모자란 듯한 헐거움이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 연극의 해롤드처럼 말이다. 02-739-8289.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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