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 빚진자의 겸허함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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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0시 뉴스를 전화로 알러주던 동료 교수의 목소리도 떨렸다.『안교수, 명예혁명이오. 우리국민이 끝내 해냈구려』
실패와 좌절만을 거듭하던 정치마당에서 우리는 오랜만에 깊은 감동을 맛보았다. 아마도 온국민의 가슴을 적셔준 이처럼 진한 감동의 소용돌이는 해방과 4·19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주인에게서 유리된 채 권력주변에서만 맴돌던 정치가 마침내 국민의 품으로 회귀하던 날, 마치 야당과 역할 바꿈을 한 듯한 노대표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앙고백을 들으며 온 국민은 모두가 거듭 태어난 듯한 충만한 기쁨을 맛보았다.
이제 모두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거리를 누비던 학생들이 다시 도서관을 메우기 시작했고, 그들과 맞섰던 전경들도 보따리를 챙겼다. 움츠렸던 언론도 서서히 제목소리를 되찾았고, 교회도 정온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어긋난 정치에 의해 한껏 뒤틀렸던 역할구조가 이제 제모습으로 바삐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정상을 찾는 모습, 자연스레 제자리로 돌아가는 움직임이 우리를 다시 감동시키는 것은 웬일일까. 여기서 우리는 정상성의 위기라는 병을 앓아온 이 나라의 정치가 그간 우리의 생활질서를 얼마나 흔들어 놓았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제자리를 찾는 이들의 마음 한구석은 아직 그리 평안치만은 않다. 이 나라의 내일에 대한 우려와 거기서 오는 불안의 그림자를 지울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위한 이 천재일우의 기회가 자칫 누구의 실수로 빗나가면 어쩌나 하는 큰 걱정이 많은 이의 가슴을 누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욕으로 얼룩진 우리의 헌정사를 바르게 다듬는 이 역사의 분기점에 서서 우리 모두가 다짐해야 할 결의는 무엇인가. 우선 이제 민주화를 위한 공동주역으로 등장한 여야의 정치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국민에 대해 빚진자의 겸허함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제 뒤늦게 민의를 읽었노라 자랑스레 외치는 여당이 명심해야 할 점은 국민은 민심을 외면한채 권력의 추만을 좇던 그들의 어제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모두의 내일을 위해 그일을 마음 한구석에 접어두고 있을 뿐이다.
야당에도 할 말이 있다. 그간 부퇴전의 용기로 숱한 희생을 치러온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는 바이지만, 그들 심중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아집과 독선이 그간 국민들의 여린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야는 앞으로 대화와 협상, 그리고 민주화의 실천과정에서 국민에로 귀의하는 참된 민주주의의 전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여당은 추호라도 권력프리미엄에 집착하여 대사를 그르쳐서는 안된다. 연이은 실기끝에 마지막으로 건져낸 이 기회에 그들의 모든 것을 국민에게 봉헌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야당할 각오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야 할 것이다. 야당도 소탐에, 빠져 계파간의 분열과 갈등으로 국민을 저버리는 80년의 부끄러운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이제 그들도 투쟁적 당에서 정책적 당으로의 본질적인 탈바꿈을 시도 해야할 때다.
광주사태의 뿌리깊은 응어리를 풀고 합의개헌에서 정권교체에 이르는 험난한 정치일정을 거치면서 「민주적자」정권을 탄생시키기까지 이들 정치 주역들 앞에 놓여진 과제는 산처럼 높고 크다.
이미 시대의 지언이 되어 버린 김추기경의 말처럼 역사와 국민 앞에 진정 마음을 비우지 않고는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난제들을 풀길이 없을 것으로 본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여야가 합주하는 민주화의 공동노력의 성공을 시샘하는 무리가 없지 않다. 여야의 공동작업이 성공으로 이어질때 극우·극좌의 일부 극단세력도 민주화의 거대한 용광로속에 함께 용해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 정치마당이 이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어지럽혀질 수 있음을 명심하자.
마음을 비워야할 사람들이 비단 정치인들뿐이랴.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국민 모두가 이성과 자기 절제, 역사에 대한 신뢰와 인내의 덕성을 실천해야할 것이다. 민주화의 열풍이 더욱 가열되면 아마도 사회 각 계층과 집단들, 크고 작은 조직 속에서 민주화의 욕구가 폭발적으로 표출되리라 본다. 이들 욕구의 정치적 수렴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무서운 몸살을 앓게될 공산이 크다.
우리는 4·19이후의 정치·사회적 혼돈을 교훈삼아 이 숨가쁜 과정에서 역사의 먼 지평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소아를 누름과 동시에 냉철한 이성으로 난국을 헤쳐 나가야할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활의 민주화도 성숙한 시민정신에서 비릇되며, 성숙한 시민만이 그것을 누릴 특권이 있음을 명심하자.
우리는 지난 몇년간 계속된 줄기찬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우리사회 곳곳에 아직도 참된 권위가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이른바「명동성당 모델」을 창출한 교회가 그러했고, 미흡하나마 일부지식인과 언론이 그러했다. 또 정치적 위기속에서 급속히 성장한 시민들도 이 범주에 넣을수 있다.
이들은 앞으로 전개되는 민주화과정에서 스스로와 국민 모두에게 이제 용기보다 지혜가, 또 자유보다 책임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하게 일깨워야 할 것이다. 폭발적으로 표출되는 민주화의 과잉 욕구와 첨예한 집단 갈등을 슬기롭게 다스리기 위해 이 사회내 양심집단들의 참된 협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민주화의 새로운 시작과 마지막 시도라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민주화의 역사적 대장정이 온 국민의 공동작품으로 성취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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