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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핵심간부들도 몰라|구체적 내용 혼자서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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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노태우대표의 특별시국선언은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급박한 정세 속에서 꾸준한 대화 끝 에 이루어낸「중지의 결정」이었다.
노대표가 자신의 위치와 국민의 마음간에 팬 깊숙한 계곡을 절실히 느낀 것은 6·10 전당대회 때였다.
1백50만 당원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후보에 지명되고, 사상최초로 현직대통령이 차기후보자의 손을 흔들어 주는 감격을 맛보았지만 잠실체육관 안과 밖의 분위기는 이미 물과 기름처럼 달라져있었다.
전당대회에서 받은 꽃다발의 향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6·10 규탄대회의 최루탄 냄새에 눈물을 흘리며 축하 리셉션을 받고 쫓기듯 발걸음을 재촉해야했던 것이다.
노대표는 연희동자택에 귀가하자마자 심각한 상념에 잠겼다. 이날 노대표가 얼마나 심각하고 침중한 표정이었던지 부인 김옥숙여사는 아무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장남(서울대)도 이 광경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자, 이 일을 어떻게 해야하나…』 노대표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부터 전개된 상황은 노대표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학생들이 명동성당을 점거했고 시민들은 학생들의 주장에 박수를 쳤다.
노대표는 몇 번의 당정회의에 참석해 강경대처와 신중론이 백중한 가운데 『정치적으로 풀어볼테니 비상한 조치만은 참아달라』 고 설득했다.
그러나 사태는 좀체 호전되지 않았다. 평소 사석에서 장형처럼 모시는 유학성의원을 김수환추기경에게 보내 수습에 협조해줄 것을 부탁했다. 주한로마교황청대사에게 김현욱국회외무위원장을 보냈다. 가까스로 가톨릭과 학생·당국간에 타협이 이루어져 명동농성이 해제됐지만 전국 곳곳에서 후속시위가 일어났고 양상은 점점 과격해갔다. 게다가 정부 내에는 D데이·H아워라는 강경조치의 신호가 도처에서 번뜩였다.
6월17일, 노대표는 이춘구총장과 함께 청와대에 갔다.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시국의 중대성을 설명했다. 전대통령도 노대표의 의견을 무게있게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대표는 『내가 최선을 다해 볼테니 한번쯤 기회를 달라』 고 했고 대통령도 흔쾌히 동의했다.
이날밤 귀가한 노대표는『언론이 하자는 대로해야겠지…이제 정국은 내가 리드할거야』 라고 기자들에게 처음으로 심중의 일단을 피력했다.
이튿날부터 노대표는 무섭게 사람은 만나기 시작했다. 소속의원들과 1대1로 만나 솔직한 의견을 들었다. 이어 20일에는 이재형국회의장, 이민우신민·이만섭국민당총재를 만났다.
노대표는 비로소『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 는 말을 했고 이어 일요일인 21일 의원총회가 소집됐다. 지금까지 참고 말못했던 엄청난 소리들이 쏟아졌다. 『야당할 각오를 하자』 『직선제로 한판 붙자』 등등….
노대표는 이 소리들을 청와대에 전했고 이어 그 후 전대통령이 만난 각계인사들을 모조리 만났다.
이제 그 자신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임을 측근들에게 비치기 시작했다. 해결방법은 △비상한 조치등 힘을 동원하거나 △양김씨와 떳떳이 정면대결하는것중 하나를 택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방안중 국가장래·외국여론의 압력 등을 생각하여 계엄령이나 비상조치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드디어 6월24일. 노대표는 비장한 각오로 청와대에 올라갔다.
노대표는 『모든걸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국가와 민족 앞에 몸을 던지자』 고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국가도 살리고 한시대의 정권을 담당했던 세력이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자면 국민의 의사에 따라야 하며 직선제를 받고 김대중씨의 사면·복권을 시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털어놓았다. 대통령 역시 생각의 방향이 비슷했다고 한다.
25일부터 노대표는 직선제 수용과 김대중씨의 사면·복권을 골자로 하는 시국수습안의 구체적 구상에 착수했다.
줄거리는 단숨에 세웠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밝히느냐였다. 노대표는 김영삼총재와 만나 상의한끝에 합의사항으로 밝히는 것이 가장 모양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김회담을 집중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김총재측은 청와대회담을 「결렬」 이라고 선언한데 이어 노ㆍ김회담에는 계속 냉담했고 6·26평화대행진을 강행했다.
노대표는 이때 『김영삼씨가 그런 사람인가…』 라며 측근들에게 탄식과 실망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국민에게 밝힐 수밖에 없다』 고 이때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26일밤 발표문을 만든 극소수 측근에게 심경과 구상을 밝히고 초안을 부탁했다. 그야말로 극비였다. 만약 그 구상이 사전에 새어나가면 정부측과 어떤 이견이 있을지, 혹은 저항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노대표는 27일밤 개인적으로 믿는 몇몇 사람들에게『비장한 각오를 하겠다』 『정치생명을 던지고 다음주에 발표하겠다』 고 귀띔했다.
28일 아침 노대표는 여느 때처럼 연희동 체육관에 나갔다. 같은 멤버인 윤길중의원에게 운동하면서『내가 먼저 버려야 하겠지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하루종일 집에서 구상하며 이병기보좌역에게 구술했다는 후문이다.
노대표는 극도의 보안을 위해 이보좌역에게 발표문을 인쇄소에 넘기거나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복사하지 못하게 했다. 만의 하나 사전에 새어나가면 어떤 부작용이 나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노대표는 당직자들에게 일체 이 같은 구상을 알리지 않아 이춘구사무총장까지 몰랐다는 것이다.
노대표의 측근들은 노대표가 24일 이후 청와대에 가지 않았으며 발표문의 구체적 내용은 전적으로 혼자서 결정했다고 밝혔다.
노대표는 『이런 일은 결재 받고 할 일도 아니고 내가 만난 사람이나 대통령이 만난 사람이 같은 사람들이니만큼 이심전심으로 동의해줄 것으로 믿었다』 고 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대표는 이 같은 자신의 행동을 이재형국회의장에게 『일을 저질렀다』 고 설명했다.
측근들은 『노대표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겠다』 는 결연한 자세였다고 말했다.

<전 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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