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도 야당할 각오 하라했다" 전대통령|전대통령-김총재 대화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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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전대통령=최근 여러가지로 어려운 시국인데 김총재께서는 정계에서 오랫동안 활약해오셨기 때문에 고견을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최근 시위가 과격해지는데 대해 김총재께서자제를 요청해주신 것은 야당 지도자로서는 용기있는 행동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 이자리가 뜻있는 회담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김총재께서 본인과 회담을 요청하시기도 했으니 먼저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간에도 만나고 싶었는데 여러가지 여건이 어려워 공식적인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오늘 시간이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십시다.
우선 나라가 잘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민이 걱정없이 살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우리 책임입니다.
대통령 임기가 이제 8개월밖에 안남았는데 물러난다는 결심이 확고하니까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김총재=시국을 놓고 정치지도자들이 모두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대통령께서 가장 고심이 많으실 것으로 짐작이 갑니다.
오늘은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심각한 시국상황이 대통령께 제대로 보고되고 있는지 의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대통령=보고는 각 계통에서 잘 받고 있고 많은 보고서를 보느라고 담배를 많이 피우게 됩니다.
◇김총재=오늘 제가 대통령을 만나뵙는다는 것을 우리국민은 물론, 세계에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만났다는 자체만을 좋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며 지금이 난국이기 때문에 국민희생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수습하는게 바람직합니다. 뭔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이야기가 되어야 수습이 될것입니다.
그동안 뵙고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몇가지 원인이 있습니다만 6·10대회가 실질적인 계기가 된것으로 볼수가 있습니다.
그전에는 우리 국민들이 자유와 안정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6·10이후에는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중산층들이 정부를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듯 합니다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안보나 국가의 기본을 위해서도 과격한 소수에게 구실을 주거나 공권력으로 수습할 수 없는 단계까지 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운동본부에서 대회를 한다고 하는 것을 두번이나 연기를 요청했는데 이제는 더이상 연기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평화적 정부이양 자체는 훌륭한 것입니다. 누구나 명예롭게 퇴임하고 보복 없는 정치, 미래가 보장되는 정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대통령께서 민주주의 기반만은 꼭 다져놓고 나가겠다고 하면 역사의 평가를 받으실 것입니다.
◇전 대통령=그렇다면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십니까.
◇김총재=4·13선언은 철회하시는게 좋겠습니다.
권력구조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면 엄청나게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김대중씨에 대한 연금은 오늘중으로라도 풀어 주시는게 좋겠습니다.
또한 6·10대회로 구속된 사람들을 대폭적으로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전 대통령=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나라마다 전통이나 역사적 경험에 따라 다른 헌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전 미국 국회의원들을 만났는데 당신 나라 헌법에 개인적으로 만족하느냐고 물어보니 만족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더군요. 미국의 경우에는 대통령이 자주 바뀌고 국회의원선거를 너무 자주해서 정책의 일관성이 없어지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겪고 있고 안보면에서 소련과의 경쟁에서 취약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헌법문제에 관해서는 어느 나라 국민도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헌법을 존중하고 법과 질서를 지키는 태도입니다. 비록 법에 불만이 있더라도 법이 고쳐질때까지는 지키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독립한 후 4O년 동안에 헌법을 8번이나 바꿨습니다. 헌법을 수정, 보완해서 고쳐 나가지 않고 무조건 일방적으로 뜯어 고치거나 변칙적으로 개헌을 해왔기 때문에 헌법이 무력화된 악순환을 겪어온 것입니다.
이번 헌법에서는 그동안의 1인 장기집권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 단임을 규정하고 평화적 정부이양을 명시해 놓고 있습니다. 과거의 혼란과 악순환이 반복되면 올림픽도 제대로 치를수 없고 우리가 그간 피땀흘려 이룬 경제발전의 토대마저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참으면서 중지를 모아 슬기롭게 풀어나가야 하겠습니다. 나는 퇴임하는 사람으로 개인적인 욕심이 없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책임정치에 대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민정당에 대해서도 야당할 각오를 가지고 일하라고 얘기해 왔습니다만 앞으로 정정당당하게, 그리고 공정하게 정치가 운영되어야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민주발전의 핵심은 평화적 정부이양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동안 헌법문제로 길거리에서 밀고 당기고, 우리 정치 수준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여야지도자들과 만났을때 여야가 합의하여 더 좋은 헌법을 만들어 오면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던 것입니다.
국회 헌법특위를 여야 동수로 구성하도록까지 여당이 양보했는데 1년이 지나도록 대화가 안되고 야당쪽에서 직선제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부득이 국논분열과 국력소모를 피하고 평화적 정부이양의 전통을 남기기 위한 충정에서 국민에게 호소를 했던 것입니다.
헌법문제는 물론 모든 변화는 항상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둑을 두다가 잘안된다고 해서 확 쓸어버리는 식으로 하면 정치발전이 되지를 않습니다.
나는 평화적 정부이양의 좋은 전통을 남기고 물러나고 싶은 생각 밖에 없습니다.
대통령은 한번으로 족하고 두번 할것은 못됩니다.
과거에 집권자들이 평생 집권을 계속 하려했기 때문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출발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렇게 된데에는 정치권에서 환경을 조성하지 못한 점은 있습니다.
국회에서 개헌문제를 진심으로 논의하고 야당의 책임자로서 합의개헌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개헌은 어느 일방이 힘으로 밀어 붙이는 식으로 해서는 안되고 그래서는 그 헌법이 오래 갈수도 없을 것입니다.
데모나 폭력의 악순환은 우리 대에서 끝나야 합니다.
◇김총재=솔직한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나이 60으로 그동안 많은 것을 보았는데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민주주의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내가 꼭 집권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하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지방을 다니면서 그동안 발전상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GNP가 높다고 해서 선진국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민주화가 된 선진국으로 발전하는데 일조가 된다면 저로서는 다행입니다.
이승만박사도 존경했던 분인데 조병옥박사가 선거중 서거한뒤 이기붕이 부정선거를 했을때 4·19당시 국민의 요구대로 부통령 선거만 다시 했으면 결국 이박사가 하야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또 박정희대통령도 내가 신민당총재로 3표차로 당선된 뒤 공작정치로 총재인 나를 몰아내려고 하다가 결국 부마사태로 해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박대통령이 약속대로 헌법을 개정해서 민주주의를 진짜 했으면 유신에도 불구하고 공적이 평가됐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대통령=다 좋은 말씀입니다. 개헌논의를 재개하도록 하십시오. 김총재께서 국회에서 합의 개헌을 이룩하여 민주주의의 좋은 작품을 만들어 주기 바랍니다. 내가 밀어 드리겠습니다. 개헌문제에 정치력을 발휘해 보십시오.
나는 정국을 이끌어가는 모든 책임과 권한을 노대표에게 넘겼습니다.
나는 남은 기간동안 대통령으로서 안보문제·남북관계·올림픽준비등 국가적인 문제에 전념하겠다는 것이 나의 거짓없는 생각입니다.
노태우대표와 만나 정치인간에 털어놓고 대화하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어떤 헌법이 맞는지 국회헌특에서 진지하게 논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총재=대통령께서 국정의 책임을 지고 계시니 책임있는 분과 이야기를 해야 할것 아닙니까.
◇전대통령=김총재,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8개월 후면 물러날 사람이기 때문에 내 말의 진실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두고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안보문제가 미묘한 사정에 있습니다. 소련이 전쟁을 원하지 않으니 이북이 쳐들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입니다만, 이북의 군비증강과 군사력의 전진배치, 그리고 소련의 태평양진출등 불안요인이 대단히 많습니다.
나는 그동안 안보를 정치나 정권유지에 이용한 일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안보문제는 초당적으로, 전국민적으로 대처해 왔으며 안보상황을 이유로 야당을 탄압하거나 불이익을 준일이 없습니다.
◇김총재=나 역시 안보문제는 핵심적인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민주주의를 안하면 안보도 안됩니다. 비상조치나 계엄령으로는 사태를 수습할 수 없습니다. 야권에서는 오히려 비상조치가 발표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대통령이 잘 생각하셔서 그런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전대통령=김총재도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 정치에는 뿌리깊은 좌경세력이 있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민주화의 구호 아래 민중 민주주의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해방구를 선언하는 급진 좌경세력은 단호히 척결해 나가야 합니다.
가능한 한 비상조치는 쓰지 않는 게 바람직합니다만, 국기가 문란하고 불안이 조성되는 경우 대통령으로서 권한과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취임이후 우리 국민의 저력에 관해서 믿는 바가 있습니다.
그동안 어려운 일을 여러번 겪었습니다만 우리 국민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자제할 줄 알고 나라 이익을 생각해서 스스로 단합하고 융화하는 저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저력으로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김총재께서도 내가 더 하겠다는 것이 아닌 이상, 평화적 정부이양의 전통을 세우는데 협조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지금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장래가 암담합니다.
이제 올림픽이 끝나고 나면, 전분야가 발전해서 문자 그대로 선진국이 될 수 있고 일본이 64년 올림픽이후 발전한 것과 같은 국력의 신장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북의 군사적 위협이 없어지고 힘의 우위를 확보해서 본격적인 평화통일 논의를 전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총재=국가안전문제와 경제발전문제는 여야가 협력해서 잘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말씀듣고 느끼는 게 있습니다.
다만 과격한 세력의 목소리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면 그 세력이 줄어듭니다. 과격한 구호를 외치는 학생은 전체 중에서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6·10사태의 구속자중 선별해서 전경을 죽인 사람이나 아주 극심한 파괴 행동을 한사람을 제외하고는 대폭적으로 풀어주십시오.
◇전대통령=모처럼 총재께서 말씀하시니까 적극 고려하겠습니다만 방화, 인명 살상범, 공공시설 파괴범의 석방은 어렵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경중을 가려서 최대한 많은 사람이 풀어지도록 내각에 검토를 지시하겠습니다.
◇김총재=가능하다면 대폭적으로 석방토록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전대통령=석방하면 다시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보장하시겠습니까.
◇김총재=순간적으로 일시적인 감정으로 저지른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포용의 뜻으로 대폭 관용을 베풀어주시지요.
그리고 김대중씨 연금은 오늘 중으로 해제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대통령=그 문제는 가능한 한 선처토록 하겠습니다.
◇김총재=그 동안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사람과 기소된 의원들에 대해서도 대부분 풀어주실 수 없겠습니까.
◇전대통령=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구속자 문제는 법적 절차가 존중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이기 때문에 법은 모든 사람이 지켜야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법 위반사건도 다중의 힘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해결해온 일이 많습니다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려면 법과 질서가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 동안 구속자에 대해서는 법이 허용하는 범의 안에서 관용을 베풀어 왔습니다.
◇김총재=김대중씨에 대해서 사면·복권조치를 취해 주셨으면 합니다.
◇전대통령=사면·복권도 대통령의 권한에 속하기는 합니다만, 자의로 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법을 집행하는 기준이 있고 수년동안 적용해온 관례가 있습니다. 이러한 점과 함께 그와 같은 조치가 이루어지려면 당사자의 자세와 여건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올림픽은 민족의 대사이니 만큼 여야의 입장을 떠나서 협조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총재=우리국민이 민주화를 성취하고 올림픽을 성공시킬 자신이 있다고 외국기자들에게 말해왔습니다. 올림픽은 국가적으로 치러야지요.
앞으로 자주 만나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가능하면 김대중의장과 노태우 대표도 같이 만나도 좋겠지요.
◇전대통령=오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평화적 정부이양과 올림픽을 순조롭게 치르기 위해서 지혜와 힘을 모아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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