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m 간격 테헤란로 걷기 싫어지는 까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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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호 23면

파리는 12개의 도로가 개선문으로 모이는 방사형 구조다. 프랑스 대혁명을 경험한 왕조가 시민봉기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설계했다고 한다. [중앙포토]

우리나라의 세종로는 12차선이나 된다. 그나마 광화문 광장을 만들면서 6차선을 줄여서 그 정도다. 그런데 이 12차선 도로의 앞은 광화문이 막고 있다. 세종로를 달리다보면 좌회전을 하거나 우회전을 해야만 한다. 갈 곳도 없는데 애초에 왜 이렇게 길을 크게 냈을까. 넓은 차선이 국군의 날 행사를 하기에는 좋지만 기능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광화문 앞 세종로는 과거 조선시대에 6조가 있던 거리다. 조선을 다스리던 6개의 행정기관이 좌우로 배치가 돼있고 그 사이는 길이라기보다는 광장이었던 곳이다. 100년 전 사진을 보면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광장 여기저기를 배회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빈 곳에 새로운 국가의 발전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신작로’를 뚫은 것이 세종로이다. 이처럼 과거에는 자동차 도로가 발전의 상징이었다. ‘자랑스런’ 도로를 더 잘 보여주기 위해 고가도로까지 만들었다. 사방에서 도로를 볼 수 있게 높이고 그 위에 자동차가 다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마치 예전에 나이키가 처음 나왔을 때 가슴팍에 대문짝만하게 브랜드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다니던 것과 같다. 요즘 나오는 옷들은 브랜드 로고가 숨겨져 있다. 서울시도 지난 10년간 고가도로를 철거해왔다.

1 세종로 12차선은 넓지만 기능적이진 않다.

자동차나 마차 같은 교통수단 중심의 도로망을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었던 때가 있었다. 대표적인 도시가 파리다. 오래된 유럽의 도시들은 모두 구불구불한 거미줄 같은 도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오래된 도로들은 도시계획 없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발명되기 전 주요 교통체계는 동물이었다. 말이나 소가 주요 교통수단이던 시절에 동물들은 오르막이나 내리막길을 싫어했을 것이다. 자연스레 동물들은 같은 높이의 땅을 걸었고 그러다보면 같은 등고선을 따라서 걷게 된다. 자연의 등고선에는 직선이 없다. 그러니 길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로망을 다 없애고 직선의 도로망으로 재구성한 도시가 파리다. 나폴레옹 3세 시절에 오스만 시장이 파리를 방사상 구조로 바꾸게 된다. 12개의 직선 간선도로가 개선문으로 모여드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설계가 나온 이유는 프랑스 대혁명 때문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 시민봉기로 인해 수백 년 지속된 왕권이 무너졌다. 당연히 이후에 권력을 잡은 자는 시민봉기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적은 수의 군대로 시민봉기를 통제해야했다. 그래서 나온 디자인이 방사상 구조이다. 파리에서 시민이 봉기를 하면 12개의 간선도로로 쏟아져 나오고 이때 개선문 지붕에 대포만 설치하면 적은 수의 군대로 시민을 제압할 수 있게 된다. 이유는 순수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직선의 도로망 덕분에 파리는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도 빠르고 효율적인 직선의 도로망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 도로망은 이후 마차에서 자동차로 주요 교통수단이 바뀐 상황에서도 잘 작동하는 도로체계였다. 그래서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가 될 수 있었다. 파리의 직선 도로망을 흉내 내어 후발주자인 뉴욕 역시 직선 도로망을 가졌다.

2 강남 테헤란로는 차량 위주라 보행자에겐 매력이 떨어진다.

파리 이후에 만들어진 도시들로서는 이처럼 효율적인 교통체계의 도로망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후발주자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자동차가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빠른 직선의 도로망을 추구하였고 그러다 보니 엄청난 양의 도로가 도시의 면적을 차지하게 되었다. 포드가 자동차를 대량생산하게 되면서 더 많은 시민들이 자동차를 소유하게 되었다. 늘어난 수의 자동차가 빨리 다닐 수 있게 더 넓은 도로가 필요해졌고 자동차 도로 중심의 도시계획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강남의 테헤란로도 그 결과이다.


 [뉴욕은 마차 속도 위주로 설계]자동차는 사람의 걷는 속도보다 빠르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시간거리’가 줄어든다. 이러한 교통수단의 속도와 도로망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마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 디자인된 뉴욕의 격자형 도로망에서 블록 하나의 평균 크기는 가로 250m이다. 반면에 자동차가 주요 교통수단이던 시절에 만들어진 서울의 강남은 블록 크기가 가로 800m의 구조이다. 자동차 평균속도가 시속 60㎞이고 마차가 시속 20㎞미터 정도 된다고 가정해보자. 19세기에 마차를 타고 뉴욕의 이쪽 사거리에서 다음번 사거리까지 250m를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45초다. 21세기에 강남에서 자동차를 타고 이쪽 사거리에서 다음번 사거리까지 800m를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48초다. 두 시간이 얼추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뉴욕과 강남의 블록 크기는 다르지만 교통수단을 고려해본다면 같은 시간거리 간격으로 사거리가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원리로 사람들이 주로 걸어서 다니던 시절에 만들어진 수천 년 전의 도시는 교차로가 더 촘촘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처럼 도시 도로망의 교차로 간격은 도시가 형성된 시대의 교통수단 속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역사가 흐르면서 교통수단은 점점 더 빨라졌고, 그러면서 도로망 사거리간의 간격은 점점 더 멀어졌다. 그러면서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800m 간격의 직선 도로망은 사람들이 걷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행자 입장에서 800m를 걷는 동안 장면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TV를 켰는데 방송사고로 화면이 정지되었다면 그 채널을 보고 있겠는가? 시속 4㎞로 걷는 사람 입장에서 800m 간격의 도로망은 12분 동안 정지화면 된 풍경의 도시이다. 사거리 간의 거리가 멀어진 대형블록으로 된 도로망은 걷고 싶지 않은 거리를 만들었다. 이미 도로망 자체가 자동차를 타고 다니게 되어 있다 보니 상점의 형태도 바뀌었다. 과거에는 길을 따라서 상점이 들어섰다. 새롭게 재개발된 아파트 단지들은 점점 더 커지고 대형단지의 외곽은 담장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그리고 역세권 쪽 대형 상가에 모든 상점이 다 들어가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동차를 지하주차장에 세워놓고 그 위에서 모든 볼일을 보고 다른 친구를 만나러 자동차를 타고 다시 다른 상가나 쇼핑몰에 간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이동을 하니 더 많은 차가 길에 쏟아져 나오고, 교통전문가는 도로를 더 만들라고 하고, 건축심의위원은 더 많은 주차장을 만들라고 한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점점 더 많은 공간을 도로와 주차장이 차지하게 되고 우리는 실내공간에 갇혀 지내게 된다. 그래서 자연에서 분리된 우리는 주말마다 산에 가려고 하는 것이다.


[도로망 간격, 소리없이 우리 삶을 조롱]실제로 우리의 도시가 좀 더 잘게 쪼개진 도로망을 가지고 상점이 1층에 깔린다면 우리는 더 많이 걷게 되고 옆 동네와 더 소통을 하게 될 것이다. 바람직한 도시는 ‘예쁜 상점을 따라서 걷다 보니 논현동에서 청담동을 거쳐 성수동까지 걸어가게 됐다’는 도시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도시는 대형 블록으로 나누어진 자동차 교통중심의 도시가 되면서 여러 개의 ‘섬’으로 나누어져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섬과 섬 사이를 자동차를 타고 떠다닌다. 도로망의 모양과 간격은 소리 없이 우리의 삶을 조종한다. 지역 간, 사람 간의 차이를 줄이고 소통하기에는 지금의 도로망 간격은 너무 넓다. 자동차 중심의 도로는 먼 곳은 빨리 갈수 있게 해주지만 가까운 곳은 빨리 지나쳐서 느낄 수 없게 만든다. 새롭게 도시를 만든다면 가로나 세로 어느 한쪽은 도로망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유현준홍익대 건축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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