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숨이 멎는 정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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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호 27면

칼 라이스터와 베르메르 사중주단의 브람스 클라리넷 오중주.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 음반을 낸 정경화 선생 기사를 읽다가 눈길이 머문 대목이 있다. 선생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같이 논다는 반려견들 이름이다. “내 아가들~”이라고 부르는 개들은 ‘요하네스’와 ‘클라라’였다. 여러 갈래 상념이 스치고 지나갔는데, 당혹감도 있었다.


요하네스(브람스)는 클라라를 연모했지만 그녀는 스승 슈만의 여자였다. 슈만이 죽고 나서도 브람스는 평생 클라라의 후견인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애완견이라 해도 두 사람의 이름을 붙여주고 같이 어울리게 해서는 좀 곤란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 연인 관계는 아니었다. ‘수술’을 했기 때문에 둘은 ‘선’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선생이 이름을 그렇게 붙인 이유는 브람스를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좋아한 만큼, 한 여인을 사랑했으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고 멀리 떠날 수도 없었던 기가 막힌 삶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선생은 요하네스가 클라라와 가까이 지내는 걸 보면서 평생 독신 브람스의 고독한 넋을 위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나는 브람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하고 묻는다면 “아뇨”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클래식을 듣는다면서 서양 음악의 3B(바흐·베토벤·브람스)중 하나로 꼽히는 대작곡가를 싫어한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싫은 것을 좋다고 할 수는 없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음악가이기에 브람스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도 해 봤다. 역사적 명연주라 일컬어지는 음반들을 어렵게 구해서 들어봤다. 그러나 몇 소절도 지나기 전에 내 미간에는 갈매기가 그려지고 한 면이 다 돌아가기 바쁘게 레코드는 내려지고 말았다. 주로 대편성이 그랬다. 교향곡 1번의 결정판 대접을 받는 칼 뵘·베를린 필의 연주와 최근 LP로 나온 요한나 마르치·귄터 반트의 바이올린협주곡도 마찬가지였다.


브람스 음악은 너무 두텁다. 그래서 답답하다. 충동·억압·비명·분출과 같은 느낌이 그득하다. 게다가 끈적인다. 듣다 보면 좋은 음악이 선사하는 정신적 고양감 대신 피로감이 몰려온다. 3대 바이올린 협주곡에 속한다는 브람스의 협주곡도 관현악 서주가 끝나고 시작되는 바이올린 솔로가 내게는 고통스럽게 내지르는 비명으로 들린다. 존경하는 오이스트라흐, 달관의 경지에 이른 정경화가 연주해도 마찬가지다.


그의 음악이 이토록 거친 질감을 드러내는 것은 성적(性的) 내면과 관련이 있다. 사랑하는 여인이 스승의 아내였으니 짝을 찾지 못한 사내는 오선지 위에 적나라한 고통을 토해냈다. 억눌린 사랑의 정열과 분출시키지 못한 성적 에너지가 비틀린 비명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브람스 음악인 것이다(최상기, 브람스 애호가). 자연히 음색은 어두운 회색이다. 벼린 칼날처럼 서늘한 기운을 좋아하는 나에게 브람스의 음악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장 자주 턴테이블에 올리는 곡 중 하나가 또한 브람스다. 칼 라이스터가 클라리넷을 연주한 ‘클라리넷 오중주, op. 115’를 듣고 단박에 좋아하게 되었다. 첫눈에 빠져드는 사랑처럼 노력도 필요 없었다. 이 음악은 오랜 친구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을 걸 듯 시작된다. 처음 듣는 음악인데도 오랫동안 들어온 것처럼 익숙했다.


2악장은 깊이 가라앉는다. 멈춘 듯한 고요가 숨을 멎게 한다. 해소되지 못한 에너지, 거친 분출 같은 것은 없다. 4악장 끝은 촛불이 꺼지고 한 줄기 흰 연기가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정적을 그린다. 늦가을, 마지막, 죽음의 이미지다. 쓸쓸하지만 감동은 기쁨보다 슬픔에서 나온다. 나는 이 곡이 브람스 최고의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클라리넷 오중주는 브람스 노년의 작품이다. 소소한 것들을 제외하면 규모가 큰 작품으로는 마지막이다. 청춘의 뜨거운 피가 식고 나서 쓴 음악이 비로소 명작이 되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같은 제목으로 만든 영화에는 교향곡 3번 3악장이 흐르지만 소설에서는 브람스 음악이 별 의미가 없다. 스물다섯 청년이 서른아홉 중년 여성에게 이 질문을 하지만 둘 다 브람스 음악을 좋아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강이 하필이면 브람스를 제목에 쓴 것은 브람스의 내밀한 성적 자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누군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고 해도 ‘사강의 브람스’를 떠올릴 필요는 당연히 없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지 묻는 것이다. 브람스를 썩 좋아하지 않지만 “아뇨”라고 대답하는 대신 “클라리넷 오중주는 좋아 한다”고 말해야겠다. 세상에는 정경화 선생처럼 브람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도 많으니까. 가을이 쫓겨 가는 이 짧은 계절에 브람스는 클라리넷 오중주 하나면 족하다.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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