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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부-야전군 신뢰 깨진 독일군, 벨라루스에서 풍비박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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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호 21면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포로가 된 독일군 5만7000명이 1944년 7월 17일 모스크바 시내를 통과하고 있다. [사진 RIA Novosti]

독일군이 러시아를 침공한지 3년이 된 1944년 6월 22일. 300만 명의 소련군과 독일군이 대치하고 있는 중부전선에서 또다시 엄청난 포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2만4000문의 대포가 일제히 공격준비 포격에 나선 것이다. 3년 전과 달리 포탄을 날려보내는 쪽은 소련군이었다. 벨라루스와 발트 3국을 수복하기 위한 소련군의 하계 대공세(바그라티온 작전)가 개시됐다.

3년간 혈투를 벌여온 양군의 처지는 어느새 완전히 역전돼 있었다. 천하무적이라는 독일군의 자신감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개전 초기만 해도 소련군과 비슷했던 병력은 3대 1에 가까운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대포는 2.5대 1, 전차와 항공기는 4대 1의 비율로 소련군이 앞섰다. 훈련과 전술 면에서 독일군이 소련군을 앞선다고 말하기도 힘들어졌다. 젊고 경험 많은 장병들이 전사한 자리를 앳된 청년이나 장년층이 메우면서 병력의 질이 자연스레 떨어졌다. 인구가 많은 소련은 이런 면에서 유리했다.


[쿠르스크 전투 1년만에 우크라이나 잃어]전술 능력도 빠르게 독일군을 따라잡고 있었다. 전쟁 초반 전격전에 처절하게 당한 소련은 1942년부터 참호와 대전차포·전차를 겹겹이 배치하는 밀집방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독일군이 돌파하면 장비를 아까워하지 않고 신속하게 후퇴했다. ‘현위치를 사수하라’는 스탈린의 명령에 묶여 고정방어를 하다 부대와 병력을 모두 잃던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졌다. 스탈린은 점점 더 군 지휘관들을 신뢰하고 재량권을 부여했다. 군부 대숙청과 함께 묻혔던 기갑전력에 의한 집단돌파 교리도 되살렸다. 소련군은 부족한 자원을 쥐어짜 기갑부대를 주력으로 하고 보병과 포병이 지원하는 기갑군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정반대로 가고 있었다. 점령한 소련 영토에서 한발짝도 물러나지 말라는 현위치 사수 명령을 점점 더 자주 남발했다. 만슈타인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은 장성들을 퇴역시키고 직접 부대를 지휘하겠다고 나섰다. 일선 지휘관이 반격을 위해 전술적 후퇴를 하는 것도 금지됐다. 결과는 1943년 동계 전투에서의 독일 남부집단군의 참패였다. 그해 8월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한 독일은 연말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공세에 속절없이 난타당했다. 1944년 5월까지 광대한 우크라이나 대부분이 독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독일 제11군단과 42군단이 코르순에서 포위돼 섬멸됐다. 크림반도에서도 제17군과 루마니아군 주력이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로 향하는 길에 버려진 독일군 차량들.[사진 Ukrainian SSR]

소련군의 다음 목표는 아직 소련 영토 안에 남아 있는 독일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이었다. 특히 중부집단군은 4개 군, 10개 이상의 군단을 거느리고 독일군 전력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맡고 있는 북부전선과 중부전선은 1941년 겨울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점령이 무산된 뒤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였다. 독일과 소련 모두 광대한 평원이 있는 우크라이나와 남부러시아에서 공방을 주고 받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독일군은 중부전선에서의 정면공격보다는 남부전선에서의 공격을 더 두려워했다. 베를린과의 거리가 짧고 강과 산맥 같은 장애물도 없었다.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의 화포와 기갑전력을 남부로 보내 무너진 전선을 안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소련군은 정면 공격을 선택했다. 허를 찔린 독일군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1000㎞에 걸친 전선에서 189개 사단, 200만 명의 소련군이 쇄도했다. 대전 초기 독일군처럼 전차와 보병·포병·공병이 유기적으로 협동하는 공세였다. 독일 전투기가 본토 방어를 위해 자리를 비운 하늘은 소련군의 야크 전투기와 IL-2 슈트르모빅 공격기로 뒤덮였다. 수적으로 열세인 독일군은 금세 분리돼 포위됐다. 독일군의 티거·판터 전차들이 분투했지만 파도처럼 밀려오는 T-34/85와 IS-2 전차에 압도됐다.


[일부 독일 장교들 히틀러 암살 시도]독일군 수뇌부는 오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댔다. 소련군의 공세가 단순한 양동작전이라고 판단해 거점 방어에 집착했다. 고립된 부대들이 급속히 괴멸됐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중앙집단군 사령관 에른스트 부슈 원수는 27일 히틀러에게 철수 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다음날 부슈를 해임하고 발터 모델 원수를 후임으로 앉혀 전선 유지를 독촉했다. 7월 1일 육군 총참모장인 쿠르트 자이츨러는 히틀러가 후퇴를 허락하지 않자 사임했다. 7월 20일 일부 장성과 장교들이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수뇌부의 혼란 속에 독일 중부집단군은 급속도로 붕괴됐다. 6월 27일 독일 제53군단이 민스크-모스크바 축선에 있는 비쳅스크에서 괴멸됐다. 7월 4일 소련군이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를 탈환했다. 다음날 독일 9군이 바브루이스크에서 항복했다. 11일에는 독일 제4군이 전사 4만명, 포로 6만명을 남기고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퇴로를 차단당할 위험에 빠진 독일 북부집단군이 퇴각하면서 13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가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독일 남부집단군에 대한 조공도 예상외의 전과를 가져왔다. 7월 27일 우크라이나 서부의 대도시 르보프, 8월 1일 폴란드 도시 루블린이 각각 함락됐다. 공격 개시 한달이 채 안된 7월 18일 소련군이 독소전 이전의 국경선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를 점령하고 부그 강을 건너 폴란드에 입성했다. 8월 초 소련군 정예부대가 바르샤바 옆을 흐르는 비스와 강에 도달했다. 소련군은 불과 5주만에 700㎞를 내달렸다. 스스로도 예상치 못한 속도였다. 소련군을 멈추게 한 것은 독일의 반격이 아니라 연료와 군수품의 부족이었다.


바그라티온 작전 이전만 해도 독일은 승리는 아니더라도 장기간의 교착상태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적어도 서류상으로 전력의 핵심인 중부집단군은 건재했다. 새로운 기갑사단이 잇따라 편성돼 보충되기도 했다. 하지만 허상이었다. 히틀러의 ‘막강한’ 군대는 병력과 장비의 만성적인 부족으로 간신히 형체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소련군의 ‘한 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 전투로 독일은 25개 사단을 잃었다. 전사·실종·부상·포로 등 병력 피해도 전체의 절반을 넘는 60만명에 달했다. 기갑 및 항공전력의 막대한 손실도 복구 불능이었다. 인적·물적 자원이 고갈되고 있는 독일이 전쟁에 승리할 가능성은 아예 사라졌다. 히틀러와 제3제국의 종말은 이제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현대차 엔진 결함 조사, 대표이사는 고발]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인 현대·기아자동차가 바로 이 신뢰의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다. 현대차는 최근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생산한 세타II 엔진에 리콜과 보상을 결정하면서 국내 판매분은 제외했다. 미국 공장의 생산 과정에서 생긴 문제기 때문에 내수용 엔진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팔린 세타II 엔진에 결함이 있다는 내부자의 주장이 나오고 역차별 논쟁이 벌어지자 급급히 내수 모델도 보증연장 등의 조치를 취했다.


현대차는 부품·강판·도금·안전도 등에서 수출용과 내수용 사양이 다르다는 주장이 나올 때마다 ‘그렇지 않다’고 강조하곤 했다. 2014년에는 일반인들이 참관한 가운데 출고장에서 무작위로 선택한 제네시스로 충돌안전성 테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반면 수출용 차량보다 한 세대 뒤진 에어백을 장착했다는 문제 제기에도, 아반떼 뒷문의 사이드임팩트 바가 수출용은 두 개인데 내수용은 하나라는 지적이 나왔을 때도 현대차는 ‘국가별로 사양과 법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소비자들이 ‘내수용 차량에 문제를 제기하면 국가별 법규 차이를 들먹이고, 수출용 차량의 문제가 생기면 내수용은 다르다고 외면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국토교통부가 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에 세타II 엔진의 결함 여부 조사를 의뢰하고 이달 초에는 산타페 에어백의 결함을 숨긴 혐의로 현대차 대표이사를 검찰에 고발하는 등 정부 차원의 대응도 본격화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지난해 820만대를 판매한 전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동차 제조업체다. 올 6월 미국 JD파워의 신차 품질조사에서 기아차는 1위, 현대차는 3위에 올랐을만큼 품질 면에서도 수준급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본진에서는 눈에 보일 정도로 소비자들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현대·기아차 대신 몇 백, 몇 천 만원을 더 주고라도 수입차를 사겠다는 글이 넘쳐난다. 수입차 점유율이 20%를 넘보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보듯이 후방의 최고사령부와 최전방 야전군 사이의 신뢰가 사라진 독일 중부집단군은 벨라루스에서 풍비박산이 났다. 남은 것은 베를린으로의 길고 긴 패주 뿐이었다.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은 기업의 미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현대·기아차가 나치 독일군과 다른 점은 아직 신뢰를 회복할 시간이 남아있고 이를 뒷받침할 자금과 기술력도 갖추고 있다는 부분이다. 이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전적으로 현대·기아차에 달려 있다.


나현철 논설위원tigera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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