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 종자전쟁, 남의 일 아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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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호 2 면

독일 제약업체 바이엘이 세계 최대의 종자 회사인 미국 몬산토를 사들인다. 바이엘은 현금 660억 달러(약 74조원)에 몬산토를 인수키로 했다고 14일(현지시간) 발표했다. 대금으로 주식이 아니라 현금을 지급하는 인수합병(M&A)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다. 반독점 규제 당국의 허가 등 인수 절차를 마무리하면 세계 최대 규모의 바이오·농업 회사가 탄생하게 된다.


농업·바이오 분야에 화학 업체들이 잇따라 뛰어들고 있다. 중국의 국영 화학 업체 켐차이나는 올해 2월 종자 분야 세계 3위인 스위스 신젠타를 430억 달러(약 48조원)에 인수했다. 지난해 말 미국 석유화학 업체인 다우케미컬과 듀폰은 올해 말까지 합병 절차를 마무리하고 다우듀폰을 설립할 예정이다. 합병 법인은 2년 안에 세 개의 회사로 나눌 방침인데, 그중 하나가 농업 부문을 맡는다. 듀폰은 세계 2위의 종자 업체다.


석유화학 제품만으로는 성장의 한계에 달한 화학 업체들이 제약에 이어 농업·바이오 분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세계 인구는 2050년 100억 명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이들을 먹여 살리려면 식량 생산을 70% 이상 늘려야 하는데 지구온난화로 경지 면적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1인당 경작가능 면적이 1970년 0.38㏊에서 2050년 0.15㏊까지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가뭄·태풍·홍수 등 이상기온 현상으로 2020년이면 지금보다 곡물 수확량이 17% 감소할 것이라는 일부 전문가의 경고도 나온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종자 개량을 포함한 바이오 기술이다. 종자는 우수한 형질을 갖춘 품종을 5~10년에 걸쳐 개량해 상품화된다. 투자 규모가 크고 회수 기간도 길어 웬만한 국가나 기업은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한다. 다국적 기업들이 종자 업체 인수에 나서는 이유다. 실제로 베르너 바우만 바이엘 최고경영자(CEO)는 “몬산토의 유전자 조작 종자와 바이엘의 작물보호제가 합쳐지면 큰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계적인 투자 전문가 짐 로저스는 “농업은 앞으로 가장 유망한 산업 중 하나”라고 전망한 바 있다.


지금까지 녹색혁명은 불어나는 인류를 부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60년대 이후 같은 면적에서 재래종의 두 배 이상 수확할 수 있는 벼와 밀 품종이 보급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 배로 늘어난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작물보호제에 대한 내성 증가 등의 영향으로 쌀·밀 등 주요 농산물의 수확률 상승세가 정체되고 있다. 대안으로 유전자 기술을 활용한 생명공학(BT), 이동통신과 사물인터넷(IoT) 등 정보기술(IT)을 적용한 지능형 농장(스마트 팜) 등이 떠오르고 있다.


여름과 겨울이 교차하는 우리나라는 차세대 바이오 산업의 핵심인 유전 자원이 풍부한 쪽에 속한다. 생화학자 노먼 볼로그 박사는 기존 품종보다 60% 이상 생산성이 높은 ‘소노라 64호’를 개발해 세계 기아 문제 해결에 일조한 공로로 197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가 신품종 육성에 활용한 품종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넘어간 우리나라 앉은뱅이밀의 후대 품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외환위기 후 국내 5대 종자 기업 중 4곳이 외국 다국적 기업에 팔려나간 후 한국의 세계 종자시장 점유율은 1%대로 주저앉았다. 83년 중앙종묘가 개발한 청양고추는 몬산토 소유다.


정부는 2021년까지 종자 산업에 8000억원을 투입하는 ‘골든 시드 프로젝트(GSP)’를 추진하고 있다. 올해 4월에는 LG화학이 동부팜한농을 인수하며 바이오 산업 강화에 나서는 등 차세대 농업 분야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하지만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농업 분야에서 뿌리 깊은 반기업 정서가 문제다. 동부팜한농은 화성 화옹간척지 10만㎡(3만 평)에 첨단 유리온실을 만들었다가 농민들의 반발로 사업을 포기했다. 동부는 토마토를 양산해 전량 수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농민단체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올 들어서는 LG가 3800억원을 투자해 새만금에 스마트팜 단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을 내놨지만 역시 농민단체의 반발에 부딪혀 표류하고 있다.


글로벌 다국적 기업들이 수십조원씩 써 가며 종자 확보 경쟁을 벌이는 지금도 국내 기업들은 온실조차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차세대 산업 육성뿐만 아니라 미래 식량 주권 확보 차원에서라도 전세계적인 종자 전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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