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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정신’ 퇴계 이황 모신 곳 공자 후손이 세운 ‘추로지향’ 비석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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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호 23면

5 도산서당 기숙사인 농운정사.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에서 지붕을 ‘공(工)’자 형태로 지었다. 김경빈 기자

세계에 내놓을 한국의 대표적 ‘정신’으로 꼽는다면을 빼놓을수 없을 것이다. 퇴계는 한국이 낳은 성인(聖人)이다. 성인은 세상을 구제하는 사람이다. 성인이라고 하면 세계 4대 성인을 떠올린다. 여기에 한국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왜 그럴까. 성인은 혼자서 나타나지 않는다. 조력자가 제 역할을 할 때만 가능하다. 공자에게는 72제자와 맹자가 있었고, 석가모니에게는 가섭과 아난존자가 있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플라톤이 있었고, 예수에게는 12제자가 나서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퇴계의 후학들은 퇴계를 성인의 반열에 드러내지 못했다. 말하자면 훌륭한 조력자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갖는 특이한 정서에 기인한다. 한국인들은 타인의 위대한 점을 발견하고 받들기보다는 비판하고 끌어내리려는 습성이 있다. 이러한 습성은 한국인이 한국인을 평가할 때 더욱 비정하고 엄격해진다. 왜 그런가. 이는 한국인들의 정서에 깃들어 있는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관련있다.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이 자칫 부정적으로 흐를 경우, 자기만이 하늘이라는 착각과 오만에 빠지기 쉽다. 때문에 한국인들은 외국 학자의 권위와 관점에 기대 한국인을 끌어내리는 경향이 있다.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퇴계를 주자의 권위 안에 가두어버린 것도, 오늘날의 학자들이 칸트나 마르크스의 권위를 빌려 비판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젠 이런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의 단점을 반성하고 겸허한 자세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봐야 한다. 한국인의 ‘한국인 들여다보기’는 옛 선비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도산서원을 다시 찾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도산서원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서원이다. 퇴계 사후 4년째 되던 1574년(선조 7)에 문인과 유림들이 건립했다. 서원의 앞쪽에 퇴계가 생전에 운영하던 도산서당이 그대로 남아 있다.

1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도산서원의 전교당. 양쪽에 보이는 건물은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서원으로 가는 원래의 진입로는 안동댐 건설공사 때 수몰됐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나 있어서 매우 운치가 있었다고 전해지지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의 진입로도 아늑하다. 왼편에 쌓아놓은 축대도 퇴계를 흠모하는 사람이 쌓은 것이리라.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무너지거나 수리한 흔적도 없다. 서원에 거의 다다를 즈음에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비석 하나가 오롯이 서 있다. 공자의 77세 종손인 공덕성(孔德成)씨가 도산서원에 들렀을 때 글을 썼다고 한다. 추로지향이란 맹자의 나라인 추나라와 공자의 나라인 노나라 같은 곳이란 뜻이다. 퇴계가 바로 공자와 맹자 같은 인물임을 시사한다. 공자를 앞세운다면 노추라고 해야 할 것을 추로라고 한 것은 발음하기가 부드럽기 때문이지 다른 뜻은 없다.


추로지향의 비석을 지나면 바로 도산서원의 앞마당에 당도한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치 고향 집 마당에 들어설 때의 그 아늑함이 느껴진다. 마당에서 바라보니 댐 가운데 시사단(試士壇)이 보인다. 1792년(정조 16)에 정조가 퇴계를 추모하여 서원 앞 송림에서 인재들을 모아 과거시험을 보게 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1796년에 단을 모으고 비와 비각을 세웠다. 원래 강변의 송림 안에 있었는데 댐 건설 때 10미터 높이로 쌓아 올렸다.


도선서원은 서당과 서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사후에 제자들과 유림들이 새로 지었다. 대학자 퇴계를 떠올리며 도산서당을 봤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규모가 매우 작기 때문이다. 3칸 본체의 맞배지붕에다 1.5칸의 가적지붕으로 덧붙인 정도다. 중국 산동성 곡부에 있는 공묘(孔廟)에 가본 사람들은 퇴계선생이 지은 거처가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공자도 초라한 집에 살았다. 공자는 집 마당에 있는 살구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으므로, 거기를 행단(杏壇)이라 했다. 행(杏)에는 살구라는 뜻도 있고 은행이란 뜻도 있다. 공자의 사후에 공자의 학문이 번성해지자 후학들이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오늘날 행단은 은행나무 아래를 의미하게 되었다.

2 도산서원 전경. 앞쪽에 보이는 건물이 이황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마하던 도산서당이다.

공묘가 커진 것은 공자 사후에 후학들과 왕들이 많은 돈을 들여 묘역을 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인품에 대한 평가 중 으뜸은 겸양이지만, 이는 공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공자를 평하길 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이라 했다. 따뜻하고, 어질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는 사람이란 뜻인데, 놀랍게도 퇴계의 인품과 한치 어긋남도 없이 일치한다. 공자가 삶의 목표를 수기(修己)에 두었듯이 퇴계 역시 수기를 중시했다. 수기가 목적인 사람은 힘자랑을 하지 않기 때문에 큰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도산서당의 규모가 작은 것은 그 때문이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도 규모가 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에서 지붕을 공(工)이라는 글자 형태로 지었다. 농운정사에 있는 두 방에는 시습재(時習齋)와 관란헌(觀瀾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시습재란 논어의 학이시습(學而時習)에서 따온 말로, 학문에 매진하라는 의미다. 관란헌은 물결을 보는 집이라는 뜻이다. 물결은 물의 깊이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물결을 보면 물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사람의 말을 듣는 것도 그렇다. 물결을 보고 물의 깊이를 알 듯,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그 사람의 깊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관란엔 그런 가르침이 녹아 있다. 농운정사 앞쪽에 위치한 역락서재는 제자인 정사성의 부모가 지어서 선물한 것이라 전한다. 역락(亦樂)이란 문구 역시 논어에서 따온 말이다. 멀리 있는 벗들까지 와서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을 말한 것이니 학문의 즐거움을 배양하려는 흔적이 곳곳에 역력하다 하겠다.

3 전교당에 걸린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 선조의 명을 받고 한석봉이 쓴 것이다.

도산서당을 지나 더 올라가면 양쪽으로 책을 보관하는 서고인 동·서 광명실이 있고, 동·서 광명실마저 지나면 진도문에 이른다. 도(道)에 나아가는 문. 진도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전교당(傳敎堂)이 자리하고 있고 정면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한석봉이 선조의 명을 받고 쓴 것이다.


그리고 그 양쪽으로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에는 박약재(博約齋)라는 현판이, 서재에는 홍의재(弘毅齋)란 현판이 걸려 있다. 모두 논어에서 따온 것인데, 열심히 학문에 정진한다는 뜻이다. 전교당에서 북동쪽으로 퇴계와 제자인 월천 조목을 모신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상덕사(尙德祠)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5 도산서당 기숙사인 농운정사.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에서 지붕을 ‘공(工)’자 형태로 지었다. 김경빈 기자

퇴계 이황

퇴계학은 흔히 심학(心學)이라 불린다. 마음을 다스리는 학문이란 의미다. 사람의 마음을 연구하고 연마하는 일은 옛 성인이나 대 학자들의 공통된 관심사였다. 요임금은 사람의 마음을 도심과 인심으로 설명했고, 공자는 사람의 본마음인 인(仁)을 하늘의 마음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여 사람과 하늘을 연결시켰다. 맹자는 사람의 마음을 인의예지라 하여 더욱 자세하게 설명했고, 주자는 사람의 마음을 우주의 본질인 이(理)와 연결시켜 만물일체사상을 확립했다. 반면 악(惡)이 생겨나는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은 여전히 미흡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것이 퇴계에 이르러 사람의 마음이 완전하게 설명되었다.


물질주의 시대에 사는 오늘의 현대인들은 마음이 얼어붙을대로 얼어붙어 본마음을 많이 상실하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다치고 베이고 아파하고 갈등한다. 본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을 회복하는 길일 것이다. 퇴적물처럼 쌓여온 적폐에서 벗어나고 본 마음을 회복하는 건 퇴계의 심학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데 생각이 미친다. 현대인들의 감수성으로 퇴계의 심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오늘날의 언어로 재해석해야 하는 건 우리들의 몫이다.


이기동성균관대 동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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