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는 바람의 노래 들었다는데… 이 선풍기 덕에 맛본 자연의 바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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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20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사러 광화문에 들른 게 발단이다. 책을 펼쳐 몇 장 읽어보니 그의 데뷔작『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뒷이야기가 실렸다. 소설가가 된 과정 자체가 소설 같은 하루키의 이력은 남다른 데가 많다.


두 겹으로 싼 종이봉투가 미어져 나올 만큼 책을 사들고 그냥 나오려고 했다. 뭔가 이끄는 힘이 작용했을 것이다. 평소 지나던 지하 주차장 쪽 엘리베이터 통로 대신 반대쪽으로 걸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살갗에 닿는 감촉이 달랐다. 자연스런 흐름이 느껴지는 미풍이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매장 한 편에 못 보던 흰색의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요즘 세상에 누가 선풍기에 눈길을 줄까. 가던 길 멈추고 낯선 선풍기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모두 하루키 때문이다. 바람의 노래까지 들었던 소설가의 감성은 탁월했다. 책에서 비롯된 자동연상 효과가 내게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당연히 지나쳤을 선풍기 바람에서 노래가 들리길 바랐다.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맛이 다른 바람이 앞에서 불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안팎 날개의 유속 차이로 바람을 퍼지게 만들어점원을 불러 진지하게 물어봤다. 일본 ‘발뮤다’사에서 만든 제품이었다. 해박한 지식까지 덧붙인 잘 생긴 청년의 설명은 착착 감겼다. 기존 선풍기와 다른 접근으로 만들어진 바람개비 날개가 차별의 원점이다. IT 기기에 쓰이는 냉각팬 핀과 비슷하지만 크기가 큰 납작한 이중날개가 눈에 띈다. 회전각이 다른 다섯 장의 안쪽 날개가 기존 선풍기와 다른 바람을 만들어준다는 얘길 들려주었다. 바깥 날개는 빠른 유속을, 안 쪽 날개는 느린 유속을 만들어내 속도 차에 의해 바람을 퍼지게 한 구조다. 자연의 바람 마냥 넒은 공간에 천천히 공기의 흐름이 생긴다.


관심은 처음 선풍기를 만든 사람이 누구일까로 이어졌다. 전기모터를 이용한 선풍기는 미국의 엔지니어 휠러의 개발품으로 알려져 있다. 길게 잡으면 백 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선풍기다. 회전 날개가 바람을 뿜어내는 기본 구조란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개선의 내용이란 결국 센 바람을 내는 효율의 극대화이거나 편의 장치를 덧붙인 것뿐이다. 바람의 특성과 질까지 신경 쓴 제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모터와 바람개비의 결합이란 선풍기의 숙명은 벗어버릴 수 없는 것일까. 최근 날개 없는 선풍기를 만들어 화제를 몰고 왔던 영국의 다이슨이 있다. 선풍기 역사상 가장 획기적 개선의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뻥 뚫린 공간에서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신기한 선풍기다. 하지만 다이슨 선풍기의 내부엔 모터와 바람개비가 들어있다. 공기 흡입과 배기를 위한 필수 요소다. 결국 선풍기란 모터와 바람개비의 조합이란 숙명은 벗지 못한 셈이다.


삼복지경엔 양귀비가 곁에 있어도 괴롭다. 끈적거리는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이 선풍기다. 작년 여름을 교토에서 지냈다. 하루 종일 에어컨을 돌려도 후텁지근한 실내의 열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에어컨을 두고도 선풍기를 돌리는 이유를 실감했다. 방 전체의 공기 순환을 위해서도 선풍기는 꼭 필요했다. 에어컨을 돌리지 않고 선풍기만으로 여름을 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엄청난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을 테니까.


이렇듯 꼭 필요한 선풍기지만 불만은 그치지 않는다. 선풍기 바람을 직접 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시원하지만 바람은 싫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존 선풍기는 바람을 세게 일게 해 앞으로만 보내게 된다. 억지 바람은 자연의 바람과 다를 수밖에 없다. 마치 깔때기에 물을 부어 한 곳에 쏟아 붓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좁은 바람의 다발이 소용돌이치며 나오는 억지의 바람이다. 덥다가도 선풍기 바람을 쐬면 이내 몸을 돌리게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자연의 바람이 더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은 넓게 퍼져 스치듯 다가온다는 점일 것이다. 바람의 세기가 아니라 넓게 천천히 퍼지는 움직임이다. 몸 전체로 받아들이는 바람의 스침에서 더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자연의 바람이 더 좋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왜 기존의 선풍기엔 적용하지 못했을까. 물론 여러 변종 상품들이 나오긴 했다. 약간의 개선점이 있긴 했지만 근본적인 바람의 질을 고려한 물건의 완성도는 미흡했다. 싸고 간편한 피서 도구 이상으로 선풍기를 바라보지 않은 점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방랑하던 젊은이, 선풍기를 원점부터 다시 들여다 보다선풍기를 원점부터 다시 들여다본 이가 있었다. 일본의 젊은 산업 디자이너 테라오 겐이다.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전 세계를 돌며 방랑했고 록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던 뮤지션이기도 하다. 우리식 잣대로 보자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제 멋대로 사는 한심한 인생일지 모른다. 음악의 길이 좌절된 젊은이는 자신의 회사를 창업한다. 음악이나 물건을 만드는 일이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공통의 지점이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온몸으로 겪은 경험은 스스로 산업디자이너의 길을 열었다.


최고의 제품이라면 통할 것이라 믿은 결정은 옳았다. 모두 한물간 아이템이라 여겼던 선풍기를 만들기로 했다. 여름철 선풍기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근본부터 다시 돌아보았다. 핵심은 바람을 내는 날개에 있다는 걸 알았다. 바람의 세기 대신 질을 높여야 해결이다. 자연의 바람을 재현하기 위한 연구의 과정은 길고 험했다.


선풍기는 모터와 바람개비의 결합이란 숙명을 받아들였다. 기존의 모터 특성을 파악해 개선의 지점을 찾았다. 모두 쓰는 교류 모터 대신 직류모터로 바꾸기로 했다. 높은 전압 대신 낮은 전압으로 구동되는 장점이 있다. 충전 배터리를 쓰면 전선 없이 어느 장소에서도 바람을 낸다. 바람개비 날개가 관건이다. 자연의 바람을 재현하는 바탕은 분산의 방법을 찾는 데 있다.


바람의 세기 대신 넓게 퍼지는 각도를 떠올렸다. 탄탄한 일본의 기초과학은 이 지점에서 힘을 더했다. 강한 것 끼리 부딪히면 힘은 상쇄되기 마련이다. 하나의 날개를 두 개의 부분으로 구분해 강약이 섞이도록 했다. 빠른 것과 느린 것을 섞어 바람을 넓게 퍼뜨리는 조화의 지점을 찾게 된다.


아름답지 않은 물건은 최고의 제품이 될 자격이 없다. 젊은이의 감성과 애플은 통하는 데가 있다. 애플 제품이 내는 간결한 아름다움을 묻히고 싶었다. 흰색의 깔끔함도 좋다. 아름다움과 깔끔함의 양립은 재질의 선택에서 나온다. 같은 플라스틱이라도 재질감을 드러내기 위해선 좋은 재료가 필요하다.


없다면 만들어 내야한다. 발뮤다 선풍기에 쓰이는 플라스틱은 유백색으로 두께의 깊이감이 묻어난다. 이것은 분명히 일본 도기의 질감과 비슷하다. 조금만 들여다 보면 발뮤다와 무인양품, 애플을 관통하는 공통 인자임을 발견하게 된다.


발뮤다 선풍기가 나온 지 6년이 흘렀다. 물건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단번에 느낄 수 있는 바람의 느낌 때문인지 모르겠다. 더 이상 새로운 상품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던 선풍기다. 발뮤다가 몰고온 자연스런 바람의 느낌은 중독성이 있다. 멋진 디자인까지 더해 생활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에게 인기몰이 중이다. 바람의 맛을 잊지 못해 나조차 사들였으니까.


작업실 비원에서 발뮤다의 바람을 즐기고 있다. 약하게 틀어 놓으면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늘 아래 잠시 누웠을 때 불어오던 산들바람 같기도 하다. 이토록 자연스런 바람의 맛이 선풍기를 통해 나온다. 기억의 쾌감이 엉뚱한 장소에서 펼쳐지는 마법은 사실이다. ●


윤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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