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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뛰어넘는 간결한 디자인의 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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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호 20면

광화문이나 서초동 교보문고를 들르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현재의 관심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 신간을 찾아보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서점을 어슬렁거리는 일이 재미있으려면 시간을 들여야 한다. 필요한 책만 달랑 사들고 나오려면 인터넷 주문이 훨씬 낫다. 정작 필요한 책은 깊숙이 숨겨져 있게 마련이다.


새로 나온 책은 이미 넘치는 정보로 알아뒀다. 책 표지와 목차만 뒤적거려도 소득이다. 다음은 잡지 매대를 찾는다. 온갖 분야의 최신 동향을 알 수 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지식은 대부분 잡지를 통해 습득했다. 수입된 미국·일본 잡지도 흘려버려선 안 된다.


책을 뒤적거리는 일이 피곤해지면 음반 매장으로 발길이 옮겨진다. 음악 산업의 퇴조에도 여전히 많은 신보가 쏟아져 나온다. 좋아하는 ECM의 새로운 타이틀이 나오면 습관적으로 사게 된다. 한번 좋아하게 되면 끝까지 순정을 바쳐야 진심이다. 들어야 할 음악은 넘치고 시간은 모자란다. 그래도 욕심을 낼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것엔 일일이 이유를 달지 말아야 사랑이다.


사들인 음반이 두둑해지면 ‘신상’이 진열된 곳으로 간다. 사무용품과 디자인 상품이 널려있다. 먹고 마시는 일이 시들해질 때쯤 비로소 생활의 아름다움에 눈 뜨게 된다. 기왕이면 일상의 주거에 예술적 상상력을 더한 물건이 채워져야 한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제 공간이 아름다움으로 돋보여야 풍요의 모습이다.


2차대전 전쟁 포스터에 담긴 미학과 생명력‘킵 캄 앤 캐리 온(Keep Calm and Carry On)’ 메모지 박스를 여기서 만났다. 간결하게 인쇄된 흰색 알파벳 폰트와 영국 왕실의 왕관 문양뿐인, 야무져 보이는 붉은색 박스다. 살펴보니 미국 피터 포퍼 프레스(Peter Pauper Press)사 제품이다. 250장의 정사각형 메모지가 들어있는 박스는 꽤 볼륨감을 지녔다. 다른 물건과 섞여 복잡한 속에서도 메모장 박스는 단연 돋보였다. 한눈에 ‘물건’임을 알아보았다.


폰트의 형태와 크기의 조화는 붉은 배색으로 안정의 흡인력을 키웠다. 덩어리져 보이는 글자의 형상은 항아리 모양으로 이어진다. 최소한의 디자인 요소만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마법이 벌어진다. 더 이상 뺄 것 없는 간결함이 외려 넘쳐 보이게 마련이다. 좋은 디자인의 힘은 생각보다 셌다.


‘킵 캄 앤 캐리 온’의 내용은 ‘진정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 정도로 옮길 수 있다. 상표처럼 보이는 문구의 내용과 메모지 박스의 용도가 어울린다. 내게 적용하자면 ‘허둥대지 말고 적힌 내용을 실천할 것’으로 바꾸면 된다. 잊어버리지 않으면 허둥댈 일도 없다. 몸이 머리를 믿지 못하는 아저씨의 불안한 기억력은 든든한 ‘빽’을 얻었다. 메모 박스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착한 물건이다.


문득 정체가 궁금해졌다. 한물 간 영국 왕실의 왕관 문양과 뜬금없이 침착하게 일을 계속하라는 이유 말이다. 여기엔 전쟁의 조짐이 극에 달했던 시대적 배경이 담겨있다. 독일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몇 개월 전 영국에 대규모 공중 폭격을 예고했다. 영국 정부는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메시지를 보내기로 한다. 당시의 전달 수단은 라디오와 공공 포스터였다. 정보국이 주관해 포스터를 만들었고 거리에 붙게 된다. 두 점의 포스터는 전쟁기간 중 영국 국민들을 안심시키고 독려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의 영국 수상이었던 처칠의 고뇌를 담은 솔직함이 돋보인다. 용기와 쾌활함을 잃지 말고 결의를 다지며 자유의 위협 앞에 온 힘을 모아 이겨내자는 내용을 담았다. 포화 속에서도 티 타임을 즐겼던 영국 사람들이다. 전쟁 통에서도 쾌활하게 지내라는 말은 멋졌다.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최선의 방법이 유머라는 영국 속담은 여기서도 빛을 발했다. 세 번째 포스터인 ‘Keep Calm and Carry On’은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미처 공개되지 못했다.


난 학창시절 배웠던 처칠의 명연설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암담한 국가적 시련 앞에 “내가 바칠 것은 피와 땀과 눈물뿐”이라던 극복의 진정성을 담은 내용 말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정치가의 감수성은 남달랐다. 석 장의 포스터 내용은 아마도 당시 수상이었던 처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냈을 것이다.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는 짙은 호소력엔 다 이유가 있다.


힘든 세상, 우리 모두 흔들리지 말고 전진하길세 포스터 모두 멋진 폰트의 문구만으로 디자인이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배색을 달리했을 뿐 기본 구성은 똑 같다. 일관성을 지닌 수준 높은 완성도는 지금 보아도 새롭다. 영국은 현대 공예와 디자인의 출발점이 된 윌리엄 모리스(1834~1896)를 배출한 나라 아니던가. 포스터 디자인의 핵심인 폰트는 공예의 부활을 외쳤던 윌리엄 모리스의 활자 느낌이 난다. 예술의 경계를 뛰어넘은 디자인이 실생활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시대정신의 관통이다.


비운의 세 번째 포스터는 60년 동안 까맣게 잊혀졌다. 2000년 영국 동부해안의 ‘바터 북스(Bater Books)’라는 헌 책방에서 발견되기 전까지는. 파블로 카잘스가 헌 책방에서 바흐의 악보를 찾아내 연주한 게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첼로 모음곡이다. 낡은 포스터 또한 바흐의 음악처럼 큰 관심을 모았다.


가장 간결한 디자인의 매력 때문인지 쇠퇴해 가는 나라의 분위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침착하게 하던 일을 계속하자는 문구가 중요하다. 어려운 경제상황에도 흔들리지 말고 열심히 살자는 다짐으로 다가왔다. 두 세대 전의 각오는 현재를 사는 후손에게도 유효했다. 진심의 언어에 담긴 울림이 깊고 묵직하게 다가온 모양이다.


세월이 지나 디자인 저작권은 저절로 풀렸다. 기본 형태를 차용한 상품들이 세계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워낙 탄탄했던 디자인 포맷은 손댈 것이 없다. 원문 그대로 혹은 적당한 변용으로 입맛에 맞게 사용하게 된 바탕이다. 왕관 로고와 ‘Keep calm and’를 남겨놓고 다음에 적당한 내용을 붙이면 저절로 멋진 디자인이 된다. 세월호 사건 이후 한 디자이너는 태극기 바탕에 ‘Keep Calm and Pray For South Korea’라는 문구를 넣어 추도대열에 동참했다. 이제 이 자체로 디자인 브랜드가 된 느낌이다.


젊은이들이 입는 티셔츠나 실내 장식을 위한 스티커 벽지도 나온다. 머그 잔과 메모 박스 같은 물건은 보통이다. 스마트폰 케이스에도 쓰인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기발한 내용의 상품이 한둘이 아니다. 세월을 뛰어넘은 좋은 디자인의 힘이다.


스테레오포닉스(Stereophonics)란 영국의 록 그룹은 같은 제목의 음반도 냈다. 시골 촌뜨기 풍의 젊은 청년들은 별 특색이 없어 보인다. 까칠하게 생긴 로커가 거칠한 음성으로 부르는 ‘Keep Calm and Carry On’ 앨범이다. 닥치고 자신들은 하던 음악이나 하겠다는 의미로 들린다.


나 또한 책상 위에 놓아둔 메모 박스를 보며 다짐을 한다. 그렇다. 차분하게 세상을 보지 못하면 흥분뿐이다. 핏대 올려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젠 안다. 제 할 일이나 제대로 잘하면 그만이다. 간결한 문구에 담긴 내용은 결코 작지 않았다. 메모지를 꺼내들면 낱장의 밑 부분에도 또 쓰여 있다. Keep Calm and Carry On. ‘진정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 ‘침착하게 굳건히 앞으로 나아가라’ ‘흔들리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얼마든지 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물건이 사람을 일깨운다. 디자인은 필요한 기능의 형태와 장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는 상징으로 번지는 의미의 역설들에도 귀 기울여 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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