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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사 잘못해 사고난 차, 쓸 만한데 폐차하자고 해서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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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호 8 면

사진 대우조선해양

한국에서 대우조선해양이란 이름은 오늘날 천형(天刑)의 대상이다. 모두가 비난할 뿐 좋게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우조선해양, 이름에서 보듯이 한 시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란 슬로건을 내걸고 이른바 세계 경영을 부르짖던, 그러나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어느 재벌그룹의 DNA가 여전히 숨 쉬고 있다. 장려했던 과거와 함께 지난 시절 한국인의 자부심으로 인정되는 세계 최고의 조선 기업이 지금은 공공의 적쯤으로 인정된다. 동네북 신세, 온갖 욕을 먹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정말 어떤 기업일까, 과거의 영광 재현은 가능할까, 아니면 헛된 꿈일까? 비틀거리는 대우조선해양의 마스터 키를 붙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정성립(66·사진) 사장을 만났다.


-오래 사시겠다.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국민께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그래도 맷집 하나는 세다. 잠도 잘 자고 먹기도 잘 먹는다. 술도 잘 마시고. 배 만드는 일은 아주 위험하다. 섬약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조금은 드세고 강단이 있어야 한다. 평생 조선업에 매달려 왔다. 한마디로 조선 인생이다. 뱃사람이 다 된 덕분에 아직은 견딜 만하다. 그렇지만 이제 그만 욕하고 지켜봐 주면 좋겠다.”


-헐, 일반 국민의 감정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아니다. 나 또한 가슴 아프다. 대우조선해양은 내 마음의 고향에 다름 아니다. 분신 같은 기업이 애물단지로 전락해 생사기로에 있는데 맘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소나기를 피하면 쨍하고 볕이 든다. 지금 내리는 소낙비는 오히려 풍요로운 자양분이 될 수도 있다. 변화를 강요당하기 전에 먼저 변화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혼나고 있는 것이다. 무한경쟁시대, 기업은 더욱 힘들다. 남의 눈물은 단지 물뿐이겠지만 눈물을 흘리는 사람에게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법이다. 실패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문제다. 나는 구원투수로 왔다. 이제 뭔가를 하려는 사람이다. 이 어려운 순간 또한 지나가리니.”


-과거 발언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 장밋빛 전망을 했더라. 그리고 대부분 어긋났고. “2008~2010년대 중반 매출이 11조~12조원에 영업이익만 1조원에 달하는 등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거제도에서는 X개도 5만원권 물고 다닌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그땐 정말 좋았다. 그러나 미래를 보지 못한 잘못은 인정해야겠다. 조선업은 영국을 거쳐 북유럽, 그리고 일본을 거쳐 한국에 왔다가 지금은 중국으로 가고 있다. 대표적인 노동집약 산업이다. 한국 사람들의 손재주(dexterity)는 세계 최고다. 용접기술은 기능올림픽에서 부동의 1위가 아닌가. 그래서 모두가 낙관했다. 배를 만드는 현장에서도, 정책을 입안하는 해당 부처에서도. 아무도 배 만드는 세상이 이렇게 급변할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이제 희망이 없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폭풍이 지나간 언덕에도 꽃은 핀다. 그렇지만 예전 같은 활황은 어렵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제 조선업이 더 이상 성장산업이 아님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수비산업이다. 단기적으로는 여전히 희망이 있지만 과거와 같은 성장세는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부가가치 배를 만드는 쪽으로 바꿔야 한다. 중후장대한 배에서 기술집약적인 배 건조로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 방산산업과 크루즈가 대안쯤 된다. 나라 밖을 보더라도 관록의 유럽은 여전히 크루즈 선박으로 재미를 보고 있고 미국은 군함과 최첨단 선박에서 강세다. 기술력과 엔지니어링이 뛰어난 선진국들이 여전히 일정 부분 활약하고 있음을 눈여겨봐야 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조선업에서 중국의 바람이 거센가. “예상보다 빠르고 드세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노동집약적인 산업 특성상 국민소득이 올라가면 조선업은 빛을 잃어가게 된다. 지금 우리가 그렇고 과거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그랬다. 중국의 부상은 무섭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 경제는 전 업종에 걸쳐 동시에 급속 발전하고 있다. 이럴 경우 인재가 전자·금융 등에 쏠리고 위험 업종인 조선업에는 상대적으로 인재가 몰리지 않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나오게 된다. 아직까지 중국이 기술력에서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변해야 살아남는다.”


-이쯤에서 모럴 해저드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런 상황을 위해 유구무언이란 말이 있지 않았을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온갖 명목으로 회사 돈을 흥청망청 탕진한 죄는 용서가 안 된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지시받고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다. 자동차로 치면 대우조선해양은 꽤 괜찮은 차인데 운전사(경영진)가 잘못해 사고 난 차와 같다. 그렇다고 아직은 쓸만한 차를 폐차시키자는 일부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는 지금 패배주의에 빠진 2만 명과 함께 지옥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당장 벗어날 수도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없다. 유일한 방법은 그저 묵묵히 걷는 것이다. 자포자기도, 패닉에 빠져 날뛰어도 안 된다. 때리더라도 앞으로 전진할 힘은 남겨두고 때려주면 좋겠다. 대우조선해양은 여전히 항해 중이고 우리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희망의 불빛을 보고 있다.”


-여전히 낙관적이다. “아니다. 근거가 있다. 액화천연가스(LNG) 선박은 자타가 공인하듯이 세계 최고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 도크에서는 협력업체를 포함해 잘 훈련된 4만여 명이 일하고 있다. 패배주의는 도움이 안 된다. 문제는 유가다. 기름 값이 이렇게 떨어질 줄은 세계적인 전문가들도 예측하지 못했다. 2010년 전후 호황은 100달러대의 유가 덕분이다. 심해저에서 기름을 캐기 위한 대형 구조물 발주가 이어졌다. 최근 들어 유가가 조금씩 오르고 있긴 하지만 과거처럼 100달러 선은 어려울 것이다. 장기적으로 배럴당 50~70달러 선쯤 보고 있다. 거기에 맞춰 배를 만들어야 한다. 조선업은 5년을 주기로 호·불황의 사이클이 있다. 과거 불황기에 나타난 이례적인 호황 국면은 중국이라는 엄청난 큰 시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착시 현상을 미처 보지 못한 대가가 지금의 고통이다. 지금은 느리지만 회복세다. 이 언덕을 넘으면 잘 익은 살구가 기다리고 있다.”


정성립 사장은 1950년 서울 가회동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자신이 나고 자란 한옥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조선항공과를 졸업했다. 술에 관한 한 적수가 없을 정도로 두주불사, 청탁불문, 장소불문, 시간불문, 안주불문의 가공할 술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영업맨이던 그가 인력담당 이사로 발령받은 당일 노조 대의원 50여 명과 마신 술의 기록은 대우조선의 전설로 남아 있다.


-전세방도 구하지 않고 결혼했다는 소문도 있더라. 원래 느긋한 성격인가. “아버지가 군인이었다. JP(김종필 전 총리)와 육사 8기 동기다. 5·16 전에 예편해 권력 맛은 못 봤다. 장인어른이 육사 2기다. 양쪽 집이 다 군인집이다. 담력과 느긋한 배포 하나쯤은 있다고 봐야 한다. 웬만해서는 꿈쩍도 않는다. 맷집 하나는 주변에서 알아준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난파선에서 선장 노릇할 수 있겠는가. 졸업 후 산업은행에서 잠깐 일하다 동해조선에서 배를 만난 이후 지금까지 평생 배하고만 살아 여기까지 왔다. 배는 내 운명이다. 대우조선·대우중공업·대우정보시스템 등등 인생 대부분을 대우란 이름이 붙은 곳에서 일했다. 내 피에 진취적이고 굴복하지 않은 대우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눈여겨봐 줬으면 한다.”   정 사장은 취미가 책 읽기, 특기는 상대방에게 “방긋방긋 웃어주기”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웃는 모습이 달마대사 같기도 하고 지방 소주회사의 마스코트인 금복주 같기도 하다. 복덩이 영감 금복주 같은 정 사장이 거제 앞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대우조선해양호를 어떻게 살려낼지 궁금해진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yule2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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