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대상 범죄에 맞선 ‘강남역 10번 출구 현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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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호 2 면

2016년 5월, 우리 사회는 ‘강남역 10번 출구 현상’ 앞에 섰다.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는 더 이상 젊은이들의 만남과 놀이공간으로 시끌벅적했던 젊음의 거리가 아니다. 여성 혐오 범죄에 희생된 한 젊은 여성을 애도하고 사회의 저변에 웅크리고 있던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과 범죄를 고발하고 각성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변모했다.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 남녀 공용화장실에서 젊은 여성이 살해됐다. 한 30대 남성이 칼을 품고 이 화장실에 숨어 여성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23세의 여성을 여러 차례 칼로 찔러 살해한 것이다. 그와 그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범인은 경찰에 붙잡힌 뒤 “여성들이 나를 무시해 참을 수 없어 아무 여자나 죽이려고 했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범인이 2008년부터 정신분열 진단을 받고 치료 중인 정신병력자로 여성들이 무시한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계획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정신병적 살인이지 여성 혐오 살인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범죄 전문가들도 약자를 노린 전형적인 ‘묻지마 범죄’라며 여성 혐오 범죄와 선을 긋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사회운동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한 네티즌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피해 여성을 추모하자고 제안한 뒤 수많은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추모 쪽지를 붙이고, 국화꽃과 안개꽃을 바치고 있다. 추모 행렬은 계속 늘어나 더 이상 쪽지를 붙일 곳이 없어 구청이 새로운 보드판을 설치하기도 했다. 퇴근길 시민들은 강남역에 모여 촛불을 들고 애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이버상에는 추모 카페가 만들어지고 각종 추모 행사가 뒤를 잇고 있다.


‘나는 우연히 운 좋게 살아남았다’ ‘죽음의 이유 따윈 없다. 그게 내가 될 수도 있었다’ ‘다음 생엔 남자로 태어나세요’ ‘살女주세요. 살아男았다’.


추모객의 쪽지 내용은 여성들 안에 잠재된 공포를 그대로 드러낸다. 추모 열기가 확산되는 것은 이번 사건이 폭력과 범죄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를 현실로 끌어냈고, 그 불안감이 이 사건을 계기로 임계점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범죄는 이미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법무연수원의 『범죄백서』(2015년)에 따르면 살인·강도 등 강력범죄 피해자 중 여성 비율은 2014년 88.7%에 달했다. 10명 중 9명꼴이다. 성폭력은 2014년 10만 명당 58.2명으로 10년 전(2005년 23.7건)보다 2.5배 늘었고, 범죄 불안감을 느끼는 여성은 2010년 67.9%에서 2014년 70.6%로 증가했다.


단지 여성이란 이유로 남성들이 여성을 살해하는, 이른바 여성 살해(femicide)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남성 중심·가부장적 문화에 길들여진 사회에서 패배감·열등의식에 빠진 남성들의 좌절과 분노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게 여성 살해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생각하고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사고가 지배적인 사회일수록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여성 혐오 범죄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남성 우월주의에 상처를 입은 남성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범죄로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여성 혐오 범죄자들은 ‘여성이 건방져서’ 혹은 ‘나를 무시해 죽였다’고 죄의식 없이 항변하는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여성이 건방지면 응징해야 한다는 인식을 당당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에 동조하는 무리가 생겨나고, 이로 인해 남성과 여성 간의 성 갈등으로 치닫는 경우도 흔하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피해자를 애도하고 여성 혐오 범죄에 대해 각성하고 대응책을 마련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한편 남성 전체를 투쟁의 대상으로 매도하는 진영이 형성되고 반대로 여성들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진영이 맞서 갈등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이 같은 공격적이고 소모적인 갈등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추모 행렬에는 여성만큼이나 많은 남성이 동참하고 있다.


비뚤어진 분풀이의 희생양이 된 23세 여성 살해사건은 우리 사회의 하위문화로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수면 위로 끄집어내 공론화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를 계기로 여성 폭력에 대한 근원적인 대책과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향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성 비하 혹은 여성 혐오는 오랫동안 형성돼 온 잘못된 성 역할과 사회적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만큼 여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사·행정 당국의 1차적 해결책 도출은 물론이고 여성에 대한 편견과 남성 중심 문화를 바꾸는 실효성 있는 양성평등 교육이 이뤄지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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