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허술한 관리가 가습기 살균제 사태 키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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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2 면

옥시 본사인 레킷벤키저의 라케시 카푸어 최고경영자(CEO)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족들을 또 한 번 분노케 했다. 그는 6일 한국 항의방문단과의 면담에서 “한국을 방문해 사과하라”는 피해자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옥시 영국 본사를 상대로 이달 중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하지만 영국법원에서 손해배상 판결을 받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에서 허용한 제품이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버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앞서 피해자들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청구 취지는 국가가 유해물질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게을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피고(국가)에 관련 법령에 따라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을 확인해 판매를 중지시킬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국가의 손을 들어줬다. 과연 법원 판결대로 가습기 살균제 사태에서 국가는 책임이 없을까.


여론조사기관 조원씨앤아이가 성인 남녀 101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응답이 절반(49.3%)에 달했다. 제조사인 옥시 책임이라는 응답(24%)의 두 배나 됐다. 국민은 사태가 커진 원인이 정부의 허술한 관리·대응에 있다고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청소용으로 쓰이던 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PHMG)이 국내에서 가습기 살균제로 둔갑한 때는 2001년이다.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 성분을 PHMG로 교체하면서 독성 테스트를 생략했다. 용도가 공업용 첨가제에서 소비재인 가습기 살균제로 바뀌었으나 정부는 별다른 허가절차 없이 업체에 맡겼다. 면역력이 약한 아기나 산모에게 치명적인 위험성이 있는데도 업체는 흡입독성 시험조차 거치지 않았다. 가습기 살균제가 보편화된 이후 원인을 알 수 없는 영·유아 사망 사례가 의학계에서 자주 보고됐다. 하지만 질병관리본부의 대응은 직무 유기에 가까웠다. 특히 2009년 한국소아학회지에서 발표한 ‘급성 간질성 폐렴의 전국적 현황 조사’엔 질병관리본부 관계자까지 참여했다. 그런데도 질병관리본부는 역학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2년이란 시간을 날려보냈다.검찰의 늑장 수사도 피해자 구제를 어렵게 만들었다. 피해자와 시민단체가 옥시를 검찰에 고발한 시점은 2012년 9월이다. 최근 본격 수사를 하기까지 검찰은 3년8개월 동안 사건을 사실상 깔고 앉아 있었던 셈이다.


문제는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이 확인된 이후에도 정부의 안이한 대응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는 지난해 유해 물질들이 생활용품에 쓰인다는 사실을 연구용역을 통해 확인했다. 그러나 이들 유해 화학물질에 대한 사용금지 조치를 하지 않았다. 환경부에서 지정한 유독물질이 현재 방향제·탈취제의 원료로 쓰이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사용금지 화학물질이 500여 종에 이른다. 반면 한국은 사용금지 물질로 불과 26종을 지정했을 뿐이다.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이 불거진 이후에야 뒤늦게 생활화학용품에 대한 안전관리 대책을 수립했다. 2015년부터 화학물질등록·평가에 관한 법과 화학물질관리법이 시행됐다. 화학물질 사고 때문에 생긴 이 법에는 생활화학제품에 사용되는 원료물질의 위해성을 평가하고 안전기준, 표시기준을 고시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 법을 제정할 당시 기업들의 반대가 거셌다. 쓸데없는 규제로 기업활동이 위축된다는 주장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던 그 법이다.


불필요한 규제는 완화하는 게 맞다. 하지만 절대로 함부로 풀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국민의 안전과 직결된 규제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기업활동에 대한 규제를 풀면서도 국민의 건강과 안전에 관련된 규제는 강화하는 추세다. 국가의 가장 큰 의무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옥시 사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노무현 정부부터 이명박 정부를 거쳐 현 정부까지 책임을 나눠 져야 한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이번 사건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 강력한 대책을 내놓아야 마땅하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질병관리본부가 각각 어떤 잘못을 했는지를 밝히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검찰이 왜 수사를 지지부진하게 끌었는지도 규명해야 한다. 유해물질 관리 체계를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등 피해자 구제를 위한 법 제도를 도입하는 등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래야 제2, 제3의 옥시사태를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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