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만에 빛 본 테러방지법, 남은 과제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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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호 2 면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가 한국인 20명의 이름과 e메일 주소, 인질 참수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신상이 공개된 이들은 공무원 11명, 기업 홍보팀 관계자 9명 등 언론을 수시로 모니터링하는 사람들로 알려졌다. 정보당국은 IS가 국내에 자생하는 추종자들에게 테러 공격을 감행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최근 사이버 보안업체인 노베타 전문가들을 인용해 북한 해커 집단이 개성공단 폐쇄 직후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는 정황이 감지됐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대한민국에서 테러는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가상의 위협이 아니라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실체적 위험이다.


테러방지법이 지난 2일 국회를 통과했다. 최초 발의 후 14년 만이다. 192시간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끝에 야당의 집단 퇴장 속에 통과됐지만 여론은 여전히 갈려 있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4일)를 보면 조사대상자 1010명 중 테러방지법에 대한 반대(51%)가 찬성(39%)보다 많았다.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엔 국가정보원의 무차별 감청이 이뤄질 것이라는 의혹, 공포가 넘쳐난다. 국정원의 감청을 피해 ‘사이버 망명’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번에 통과된 테러방지법은 일반인들까지 사생활 침해를 걱정할 만큼 국정원에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우선 이번에 새누리당이 통과시킨 법은 2003년 당시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던 법보다 남용·악용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를 강화했다. 노무현 정부 때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 정보위를 통과한 법안은 대테러센터를 국정원에 설치하고 수사권까지 부여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도 “실무적으로 테러를 사전에 예방하는 일은 강력한 정보기관이 수행해야 한다”며 국정원에 힘을 실어줬었다. 이 법안엔 유사시 군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었다. 당시 천정배 열린우리당 의원 등 일부 법사위 소속 의원들은 이 같은 조항을 문제 삼아 법안에 반대했다.


반면 이번에 새누리당의 테러방지법은 대테러센터를 총리실 산하에 두고 국정원에 수사권을 뺀 정보수집권만 부여했다. 군 병력 동원 조항은 들어 있지도 않다. 14년 전 현재 야권이 집권했을 때 추진했던 법보다 악용 소지를 훨씬 줄인 보완된 법이라 할 수 있다.


테러방지법이 통과되면 모든 국민이 무차별 감청을 당할 것이라는 우려 역시 과장된 것이다. 테러방지법은 유엔이 지정한 테러단체 조직원이거나 이에 협력한다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로 ‘테러위험 인물’을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 국정원이 테러위험 인물을 감청하려면 반드시 법원의 영장을 받아야 한다. 특히 내국인에 대한 감청영장은 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의 허가를 받도록 돼 있다.


대부분의 주요 국가들은 테러대응체계를 강화하는 추세다. 선진국들은 테러 대응에 대해선 여야나 진보·보수 등 정파를 떠나 협력하고 있다. 미국 하원은 지난해 11월 난민 수용을 억제하기 위한 ‘외적에 대항하는 미국인 안전법’을 통과시켰다. 국토안보부 등이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하지 못하면 어떤 난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난민 수용에 관용적인 민주당 의원 47명도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지난해 파리 테러를 당한 프랑스는 비상사태 선포 없이도 대테러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프랑스 의회는 지난해 5월 테러와 연관된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에 대해 법원 영장 없이 e메일·휴대전화를 감청할 수 있는 내용의 보안법을 통과시켰다.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때 우리의 테러방지법은 오히려 너무 늦은 감이 있다. 또 앞으로 더 보강하고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다. 정권 때마다 불거진 불법 도·감청, 정치 개입 댓글사건으로 국정원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여전히 높은 상태다. 이번 테러방지법 통과로 감청 대상이 명확해진 만큼 국정원의 책임도 무거워졌다.


테러와 무관한 사람들을 감시하거나 정치에 개입하는 데 권한을 남용한다면 엄중한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만약 테러위험 인물에 대한 감시 소홀로 테러가 발생한다면 국정원 담당자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이제 국정원은 테러방지법 통과를 계기로 국가안보와 테러 방지라는 본연의 임무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정권의 국정원’이 아니라 ‘국민의 국정원’으로 거듭나는 길이다.


국회는 3년째 낮잠을 자고 있는 사이버테러방지법안에 대한 처리도 서둘러야 한다. 해마다 대규모 북한발 사이버 테러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는데, 국회가 진지한 논의조차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다. 만약 법안이 악용될 소지가 있으면 여야가 팩트를 갖고 토론을 해 수정하면 되는 것이다. 테러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 정부와 국회가 가장 우선순위에 둬야 할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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