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원정대는 왜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렸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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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8호 20면

그림 1 외젠 들라크루아, 『콘스탄티노플에서 입성하는 십자군』, 1840년. 1204년 4차 십자군 부대가 원정지에 입성하는 장면이다. 십자군 전쟁이 원래의 대의에서 벗어난걸 상징했다.

장군과 군인들이 말을 타고 궁전에 들어선다. 바다에 인접한 시가지가 배경을 이루는데,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궁전에는 시신들이 나뒹굴고 있으며 병사가 휘두르는 칼에 희생되기 직전의 여성도 보인다. 노인들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적장에게 선처를 호소한다. 뚜껑이 열린 채 속을 드러낸 보석함은 약탈이 한창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어떤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것일까? 그림에 등장하는 승자와 패자는 누구일까?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의 대결을 묘사한 상상화, 13세기(그림 2).

그림 1은 19세기 낭만주의 미술의 대가인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의 작품이다, 1204년 이른바 4차 십자군 부대가 원정지에서 성공적으로 입성을 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일반적인 승전 그림과는 달리 들라크루아는 이 장면을 영광의 순간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십자군 지휘관들의 모습도 영웅적 풍모와는 거리가 있다. 장거리 원정의 대의와 명분이 무엇이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처절함만이 남은 인간사의 비극적 드라마로 역사적 순간을 묘사하고 싶었나 보다.


십자군전쟁은 11세기 말부터 약 2세기에 걸쳐 진행된 군사적 충돌이었다. 서유럽의 카톨릭 교도가 예루살렘과 여타 성지들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한다는 목적으로 진행한 장거리 원정이었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이런 목적이 현실화됐다. 가톨릭 진영과 이슬람 진영은 예루살렘의 지배권을 두고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그림 2는 양 진영이 각각 영웅으로 추앙했던 영국 군주 리처드 1세(Richard Lionheart)와 이슬람 술탄 살라딘(Saladin)의 결투 장면을 묘사한다. 리처드 1세의 창이 짙은 얼굴색의 살라딘을 쓰러뜨리는 모습이다. 실제 이 영웅들 간에 대결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그림은 십자군 원정을 종교전쟁으로 이해하고 가톨릭의 승리를 갈구했던 서유럽 인들의 상상력이 발현된 작품일 뿐이다.


초반의 숭고한 대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됐다. 대규모 원정대를 조직하고 수송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으므로, 누가 이 비용을 대느냐가 원정의 실제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그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4차 원정이었다.


삽자군 4차 원정 위해 1만2000명 집결 1201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주창에 따라 이집트를 공략할 십자군 원정부대 모집이 서유럽 전역에서 이뤄졌다. 이듬해에 3만여 명이 항구도시 베네치아에 집결해 베네치아인들이 준비한 500척의 선박으로 이동한다는 계획이 수립됐다. 당시 베네치아는 동방무역을 통해 유럽 최고의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무역도시였다. 후추와 같은 향신료, 직물, 보석류 등을 아시아에서 수입해 유럽 전역에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금융업과 해운업, 조선업은 베네치아의 경쟁력을 뒷받침한 일등 공신들이었다. 원정에 필요한 선박을 건조하고 지중해 너머로 원정대를 운송하는 일을 맡기에 베네치아는 적격이었다.


그런데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예상인원의 3분의 1수준인 1만 2000명만이 베네치아에 집결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베네치아에 약속한 수송비를 낼 능력이 없었다. 오랜 시간과 비용을 들여 선박을 건조하고 운송 인부를 뽑아두었던 베네치아로서는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베네치아의 도제(국가수반) 단돌로(Dandolo)는 수송비를 내지 않으면 병사들을 억류하겠다고 위협했다. 난감해진 십자군에 단돌로는 헝가리의 항구도시 차라를 공격해 주면 수송비를 면제해 주겠다고 유혹했다. 차라는 장기간 베네치아에 경제적으로 종속돼 있다가 20년 전에 독립적 지위를 얻은 도시였다. 십자군은 차라를 함락시키고 주민들을 추방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은 격분했다. 십자군이 이슬람 영토가 아닌 카톨릭 도시를 공격하다니! 교황은 십자군의 행위를 맹비난하고 그들 모두를 파문했다.


이제 십자군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의 이후 선택은 더욱 놀라웠다. 비잔틴(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온 제안이 발단이었다. 비잔틴제국은 동방정교를 신봉하는 기독교 제국으로,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동방무역의 최고 요충지였다. 한창 권력다툼 중이던 알렉시우스 앙겔루스는 십자군에 자신이 권좌에 오르게 도와주면 십자군의 이집트 원정 비용과 기사를 제공하고,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카톨릭의 관할로 넘기겠다는 엄청난 제안을 했다. 곤경에 빠져있던 십자군은 마음이 흔들렸다. 일이 잘 진행되면 이집트 원정도 이룰 수 있고 교황의 마음도 돌릴 수 있지 않겠는가. 한편 베네치아인들에게는 예상치 못 한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다. 동방무역의 최고 무역항으로 지배력을 확대할 절호의 찬스였다. 20년 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 상인들이 축출되었던 아픈 기억도 남아있었다.


1203년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수송선을 타고 콘스탄티노플 원정길에 올랐다. 치열한 공성전 끝에 십자군이 승리를 거두었고 제안자는 알렉시우스 4세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십자군과의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화하기 위해서 세금을 늘리고 십자군에 주둔기간 연장을 요청했다. 이에 십자군과 베네치아는 추가 금액을 요구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알렉시우스 4세의 반대파가 세력을 규합하더니 그를 폐위시키고 십자군과 대치했다. 이제 십자군은 망설일 것이 없었다. 전투가 시작됐고 이틀 만에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도시에 대한 약탈과 살육이 사흘 동안 이어졌다. 그림 1은 이 끔찍한 상황 가운데 극히 일부만을 보여줄 뿐이다. 시민들은 도륙, 강간, 노략질의 희생양이 됐고, 귀중한 건물들과 보물들은 파괴, 방화, 몰수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때 약탈된 재산이 총 90만 은마르크였다. 이 중 약 10만 은마르크를 십자군이 차지했고 약 20만 마르크를 베네치아가 챙겼다. 나머지 중 일부는 새 황제의 몫이 됐고, 일부는 원정에 참여한 기사들이 개인적으로 챙겼다.


비잔틴제국 천년 역사에 최악의 수난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십자군전쟁이 애초의 대의와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원정 목적지가 무슬림에게 점령당한 기독교 성지가 아니라 같은 기독교를 믿는 지역이었다는 점, 이런 의사결정에 교황의 영향력이 제한적이었다는 점, 그리고 후원 도시인 베네치아가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실제로 베네치아는 원정의 결과로 경쟁도시인 제노바를 제치고 지중해 무역의 주도권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내세워 라틴 제국을 건설하고는 교황의 승인까지 받아냈다. 그 후 라틴 제국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베네치아의 번영은 계속됐다.

1271년 마르코 폴로 일행이 베네치아에서 출항하는 모습을 그린 15세기 작품(그림 3).

종교적 외피만 쓴 십자군 원정 그림 3은 13세기 후반에 베네치아 상인 집안 출신의 마르코 폴로가 아시아로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고급스럽게 장식된 건물들과 운하를 항해하는 선박들이 무역으로 부유해진 항구도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베네치아인들이 이런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교황의 뜻을 수차례 거스르면서까지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야 말겠다는 그들의 집요한 욕망과 의지가 작용했다.


오늘날 십자군원정은 대외적으로 숭고한 정신적 목표를 내걸지만 실제로는 물질적 이득을 취하겠다는 욕망을 내포한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용어가 됐다. 이런 조롱조의 관념이 형성된 데에는 분명한 역사적 근거가 있다. 11세기 이래 유럽의 중세사회는 안정기에 접어들어 인구가 팽창하고 무역망의 확대를 필요로 했다. 이때 발발한 십자군원정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외피를 쓰고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경제활동의 확장을 바라는 세속적 계산을 담고 있었다.


특히 목적지를 두 차례나 바꾸고 끔찍한 살육과 약탈로 악명을 떨친 4차 십자군 전쟁은 유라시아를 잇는 핵심 교역로를 장악하려는 베네치아의 야욕이 만들어낸 변질한 원정이었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현재 경제사학회 이사를 맡고 있으며 『세계경제사 들어서기』(2013) 『경제사:세계화와 세게경제의 역사』(2012)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2008) 등 경제사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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