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트 쿠튀르는 어떻게 탄생하나 신참 디렉터의 8주 도전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40호 30면

“디오르의 말 한 마디에 여성의 치마 길이가 달라집니다.”
프랑스의 전통적인 패션하우스 ‘크리스찬 디올’의 창립자 크리스티앙 디오르(1905~1957)가 패션사에 끼친 영향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1947년 2월 12일 디올의 첫 오트 쿠튀르 쇼를 본 패션지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 카멜 스노우는 “크리스티앙, 당신의 드레스는 정말 새로운 룩을 갖고 있군요”라고 감탄했다. 20세기 패션의 혁명으로 불리는 디올 스타일이 ‘뉴 룩’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다. 부드러운 어깨선과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재킷. 그리고 꽃부리처럼 퍼지며 종아리 아래까지 떨어지는 길이의 스커트. 디오르는 2차 대전의 영향으로 군복처럼 각지고 딱딱한 옷을 입던 여성들에게 ‘꽃처럼 아름다운 여성성’을 되찾아주었다.
영화 ‘디올 앤 아이(DIOR AND I)’는 존 갈리아노의 뒤를 이어 2012년 크리스찬 디올의 6번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47)가 생애 첫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이기까지 보낸 8주 동안의 시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오트 쿠튀르는 디자이너의 독창적인 디자인과 장인들의 숙련된 기술이 집약된 최고의 의상을 말한다. 쇼를 열기까지 보통 6개월 정도의 준비기간을 갖지만 이 ‘신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8주.
악조건은 또 있다. 20대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남성복 브랜드로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은 라프 시몬스가 디올에 오기 전 몸담았던 곳은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질 샌더. 당연히 그의 이름 앞엔 ‘미니멀리스트’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그런 그에게 오트 쿠튀르라는 전혀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디올은 여성적인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실루엣과 형태로 그걸 표현해야 하고, 적당한 장식과 낭만 그리고 화려함도 있어야 한다. 1000명에 달하는 디올의 직원들은 그런 경험이 없는 시몬스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영화는 창립자 디오르의 영혼이 살아 숨쉬는 아틀리에와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의 불안하면서도 혁신적인 만남을 조용히 관찰한다.

영화의 백미는 무대 뒤에 숨겨진 이야기와 팽팽한 현장감, 그리고 디올 아틀리에 직원들과 라프 시몬스의 미묘한 긴장감이다. 1947년부터 수석 디자이너가 6번이 바뀌는 동안 크리스찬 디올에서 변하지 않은 단 하나는 바로 아틀리에다. 신입부터 40년 넘게 일한 재봉사까지 그들은 스스로를 ‘디올의 아이’라고 생각한다. “밤마다 무슈 디오르의 유령이 아틀리에 건물을 순찰 다닌다”고 믿는 그들에게는 디올 오트 쿠튀르 의상의 초안을 만든다는 막강한 자부심이 있다.
고객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장면. 아침까지 모든 드레스가 완성돼있기를 기대했던 시몬스는 수석 재봉사가 고객의 부름 때문에 뉴욕에 가고 그 바람에 계획이 틀어진 걸 알고 어이없어 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뉴욕의 한 고객 탓에 15벌의 드레스 피팅이 연기되다니.”
이에 아틀리에 직원들의 대답은 명확했다. “돈이 없으면 컬렉션도 못 열고 아틀리에도 유지할 수 없다. 철마다 옷을 4억 원 어치 씩 주문하는 고객이라면 어디서 피팅을 요구하든 우리는 거절하지 않을 거다.”
그들은 오히려 라프 시몬스의 방식 자체를 잘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는 레디 투 웨어를 주로 만들었으니까요. 그건 자르고 붙이고 박아버리면 끝이잖아요. 여기서는 공을 들여야 해요. 이걸 다 한 땀 한 땀 떠야 하죠.” 2012년 가을겨울 오트 쿠튀르 컬렉션은 그래서 라프 시몬스만의 도전은 아니었다.
이쯤에서 관객들은 제목에 있는 ‘아이(나)’의 정체가 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라프 시몬스 사이에 놓인 55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을 촘촘하게 메워주는 매개체가 바로 아틀리에였음을. 결국 영화는 럭셔리 패션 하우스의 화려함 이면에 숨은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엔딩 10분 전, 전 세계가 주목하는 쇼가 마침내 시작되고 무대 뒤에 선 라프 시몬스는 결국 울음을 터뜨린다. 영화 내내 기쁨도 분노도 없이 건조한 침묵으로 일관해 왔던 그가 마지막까지 그의 손이 돼 주었던 아틀리에 직원들에게 감사의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 담긴 그의 인사에 아틀리에 직원들은 활짝 웃으며 답한다. “드디어 첫 패션쇼를 치렀네요. 쿠튀르는 참 아름답죠?” 라프 시몬스와 아틀리에가 지금까지 디올의 세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말에 들어있을 터다. ●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크리스찬 디올 코리아, 영화사 진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