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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반 총장에게 돈 줬다는 박연차 서면·구두 진술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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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돈 23만 달러를 받았다는 보도는 신빙성이 있을까.

[이슈추적]
2009년 ‘박연차 게이트’ 재구성
여비서 일정표에 반기문 이름 두번
“베트남 주석 한국 초청 위해 돈 줘”
박씨 진술했지만 조서엔 안 남아

노무현 숨진 뒤 수사 동력 잃어
박씨 진술 사실 확인 안된채 종료
검찰 캐비닛에 내사자료로 보관

의문을 풀기 위해선 먼저 2009년 박연차 게이트가 시작된 배경과 수사 과정을 따라가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갈 정도로 집요하게 이뤄진 대검 중수부의 수사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도 함께 풀어야 한다. 당시 사건에 얽힌 검사들이 최근 정국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인 점도 눈길을 끈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중수1과장으로 주임 검사였고, 홍만표 변호사는 브리핑을 담당했던 수사기획관이었다. 이인규 변호사는 대검 중수부장, 박영수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특별검사는 박연차씨의 변호사였다. 사건에 관련됐던 전·현직 검사 및 청와대 인사 등이 그동안 한 설명을 바탕으로 당시 사건을 재구성한다. 하지만 반 총장을 상대로 한 검찰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데다 반 총장도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어 이들의 주장이 실체적 진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 미완의 사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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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차, 검찰에 금품 제공 ‘리스트’ 제출

2009년 1월 취임한 이인규 대검 중수부장은 박연차씨 사건 기록을 넘겨받은 뒤 수사 확대를 결심한다. 우병우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장이 대검 중수부 과장으로 선발되면서 수사팀이 짜여진다. 당시 검찰 내에선 정동기 청와대 민정수석의 조언이 있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정 수석과 우 과장은 2005년 대구에서 지검장과 특수부장으로 같이 근무한 인연이 있었다. 정 수석은 이 중수부장의 고교 선배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정권 차원의 수사라는 지적이 나왔고 수사는 2라운드에 접어들게 된다. 대검 중수부는 전임인 박용석 부장-최재경 수사기획관팀이 구속한 박씨를 상대로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에 시동을 건다.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딸들도 처벌하겠다”는 검찰의 압박에 박씨는 돈을 준 정치인과 관료들의 명단을 작성해 제출하게 된다. 그해 3월을 전후해 작성된 리스트엔 반 총장의 이름도 포함됐다. 일부는 구체적 액수까지 적시됐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박씨가 두 손과 두 발을 다 든 채 백기 투항을 한 것”이라며 “30명 이상이 명단에 들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수사팀은 리스트를 바탕으로 계좌추적 등 사실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혐의가 드러난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잇따르면서 수사와 취재 경쟁이 가열됐다. 검찰은 리스트에 들어 있는 인사들의 명단을 조금씩 흘렸다. 반 총장의 이름이 출처를 알 수 없는 곳에서 나왔다. 박씨는 반 총장이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있던 2005년 돈을 준 이유에 대해 “베트남 주석을 국빈 자격으로 한국에 초청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검찰은 진술조서에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박씨의 여비서에게서 압수한 ‘회장님 일정관리표’에도 반 총장의 이름이 두 번 기록돼 있었다. 검찰은 계좌추적과 외화출금자료를 들이밀며 반 총장에게 2만~4만 달러를 준 사실이 있는지 박씨에게 물었다. 박씨는 “2007년 유엔 사무총장 취임을 축하하는 의미로 성의를 표시했다”고 진술했다. 돈을 전달한 장소는 베트남과 미국 뉴욕 등 두 곳을 놓고 진술이 오락가락했다. 수사팀 일각에선 “2000만원씩 두 차례 돈이 전달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검찰은 반 총장에 대한 수사를 확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소환이 불가능한 반 총장을 상대로 조사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데다 국가 위신만 손상시킬 뿐 실익도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금품수수 의혹이 언론 보도로 불거지면서 리스트에 포함돼 있던 다른 인사들에 대한 수사도 함께 중단됐다.

검찰 캐비닛엔 반 총장 기록 있을 것

노 전 대통령이 숨진 이후 반 총장의 금품수수설이 검찰 안팎에서 다시 불거졌다. 그러나 대검 중수부 해체론 등 정치적 파장이 커지면서 검찰은 동력을 잃은 채 표류했다. 당시 검찰 고위직은 노 전 대통령 사망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도 “시간이 나면 반 총장 등에 대한 조사 기록은 남겨둬야 한다”고 후배 검사들에게 주문했다. 하지만 사건은 지금까지 미완의 상태로 남게 됐다.

이후 반 총장의 대권 도전설이 나온 지난해부터 반 총장과 관련된 의혹이 정보시장을 중심으로 떠돌았다. 검찰도 여론의 동향을 의식해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된 수사 자료를 챙겨 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박연차씨의 공식적 수사기록에는 반 총장과 관련된 진술은 없었다”고 말했다. 반 총장 기록은 허공으로 떠버린 것일까. 아니다. 박씨의 진술은 내사기록보고서 형식으로 보관돼 있다는 것이 검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피의자가 변호사 등을 통해 제출한 문건을 검찰이 임의로 파기할 수 없기 때문에 별도로 편철돼 ‘검찰 캐비닛’에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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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반 총장과 관련된 의혹은 어떻게 불거졌을까. 당시 수사팀과 일부 검사들이 갖고 있는 반 총장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 총장의 금품수수 의혹을 제기하며 대권 도전설에 거부감을 보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다고 검찰이 다시 수사에 나설 가능성은 극히 작아 보인다. 공소시효가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만약 반 총장이 의혹을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할 경우 사실 확인을 위한 수사가 가능하다. 결국 이번 사건은 사법적 심사보다는 정치적 공방으로 번질 공산이 커 보인다. 반 총장의 대응이 주목되는 이유다.

박재현 편집국장 대리 abnex@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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