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어진」거의가 소실|최광수씨 철종「어진」복원계기로 알아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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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전통화가 최광수씨에 의해 모사 복원된 철종대왕어진은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조선조 군왕의 유일한 군복본어진이라는 점에서 왕실복식사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현재 어진이 남아 있는 것은 전주경기전의 이태조 전신상과 창덕궁에 소장된 영조대왕의 반신상, 고종의 전신상등이 있으나 이들은 용포를 입고 그려진 것이고 군복을 입은 전신상은 이번 철종대왕의 것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조선조에서는 대개 5년정도에 한번씩 왕의 어진을 그렸다. 나라를 연 태조의 경우에는 20점 이상이 그려져 한성·개성·전주·경주·영흥등지에 봉안됐다.
왕들의 어진은 창덕궁안선원전에 봉안되었고 조정에서는 왕의 생신에 다례를 올렸다. 왕의 어진을 그릴 때에는 정승중에서 한 사람이 책임자가 되어 도화도감이 설치되고 전국에 서 가장 그림을 잘그리는 3∼4인을 선발하여 그리게 했다.
왕의 어진은 화가들이 왕을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을「도사」라하고 그려진 그림을 보고 다시 그리는 것을 「모사」라 했다.
역대왕의 어진은 자연적인 훼손에 따라 1백여년만에 한번씩 모사되었다.
지방에 있는 어진을 모사할 때는 서울로 가져왔는데 왕이 행차하는 것과 똑같이 위엄을 갖추어 모셔와 다시 그렸다. 지방에 분산 봉안한 것은 화재의 위험 때문이었다.
역대왕의 어진은 임난·병자난 때 많이 소실되었으나 창덕궁의 것은 보존되어 왔는데 6·25때 부산으로 옮겼다가 불의의 화재로 대부분이 불타버렸다.
철종의 군복본 어진도 이 때 불탔으나 다행히 반쪽만 소실되었고 얼굴부분은 조금 밖에 타지 않아 모사복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철종어진은 철종12년(1861년) 당시 검교제학의 지위에 있던 김병익등의 감독아래 당대 산수와 인물화에 있어 필치를 자랑하던 희원 이한철(1808∼?)을 비롯, 김하종등 화원들이 경희궁 흥정당에서 그렸다.
어진의 세부적 특징은 머리에는 증자와 공작깃, 그리고 구영이 달린 모자를 썼고 군복은 양태문 갑사로 가슴과 양어깨에 5개의 용이 새겨진 문양이 화려하다. 밑바닥은 좌우에 청룡이 용상을 떠받치는 자세로 제왕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최씨는 지난 2월 당국의 승인을 얻어 창덕궁에서 반쪽만 남은 어진을 화실로 봉송하여 모사작업에 착수했다. 최씨는 석주선 문화재위원과 이강칠 전문위원등의 자문을 받고 각 박물관에서 서지·복식학의 자료를 조사하여 그림을 그렸다.
어진을 그리면서 물감은 처음 프랑스·중국등의 물감을 사용하려다 순수한국 물감을 쓰기로 하고 최씨특유의 경험적 배합을 했다. 모사과정에서 31세때의 젊은 왕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얼굴색과 눈동자 초점을 표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최씨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면서부터 3개월동안 매일 상오3시에 일어나 목욕하고 한복차림으로 좌정하여 정성을 쏟아 그렸다고 말했다. <임재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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