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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일대 복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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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사직단 일대가 옛 도습대로 복원된다. 조선태조4년(1395년)에 세워져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기원하는 국가적인 중요한 제사를 올려오던 사직단은 일제때인 1922년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주변담장·신실·신문·신도·재실·사직서등 중요시설들이 없어지고 단만 남아 있다.
서울시는 올해 1단계사업으로 3억원을 들여 사직단과 담장·신실등을 복원하고 뒤이어 내년부터 재실·사직서등도 복원해 나갈예정이다.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와 오곡의 신인 직을 가리키는 것으로 조선왕조는 국사단과 국직단을 세우고 1년에 중추등 네번에 걸쳐 큰 제사를 지내고 수시로 기우제등의 제사도 지냈다. 국사단과 국직단은 현재 비교적 건실하게 보존되어 있으나 일부 장대석축이 이완되어 있고 양단의 사방으로 나있던 계단이 없어진 상태다. 이번 복원작업에서는 축대를 바로 집고 폭 1m정도의 3단으로 된 계단이 만들어 진다.
사직단은 동쪽에 국사단, 서쪽에 국직단이 있고 각각 정방형으로 한변의 길이가 7·7m다.원사이는 1·55m정도 떨어져 있다. 석축은 단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현재하단은 땅속에 조금 묻혀 있어 복원 때는 그것을 모두 드러나게 한다.
단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과 문, 그리고 신실을 포함한 넒은 지역을 감싸는 바깥 담장과 문도 복원된다.
원을 둘러싸는 담장은 현재 남아 있는 지대석을 따라 높이 1m, 총연장 1백44m로 전돌로 쌓는다. 담사이에 4개의 문을 만든다. 현재 문의 유구가 가장 잘 남아 있는 서문을 기준으로 하여 복원한다.
바깥담장은 높이 2m, 총연장 2백86mm로 네모난돌(사괴석) 담장을 설치하며 윗부분은 한식기와로 잇는다. 4개의 문을 만드는데 북문인 북신문만 3간(폭 7·2m)으로 크게 만들고 동·서·남 세문은 단간으로 한다.
신을 모신 신실은 현재 기단과 초석이 일부 남아 있다. 세워질 신실은 건평4·6평으로 맞배지붕에 용마루양단에 용두를 앉히고 전면에 합문을 낸다.
북신문에서 단까지, 또 단에서 신실까지 가는 신도는 모두 훼손되었다.
신도는 화강석으로 깔기로 했다.
재실은·바깥담장밖 오른쪽 뒤편에 있었으나 현재 완전히 훼손되어 어린이놀이 시설이 되었고 근처에 수영장과 연관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복원을 위해 고증을 담당한 신영훈문화재전문위원은 『일체의 유구(유구)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 재실의 복원은 문헌에 따를 수 밖에 없다. 문헌중 「사직서의궤」 에 제사를 담당한 전사청등 6개의 건물과 문·우물·담장의 크기, 구조가 밝혀져 있다.
사직서는 현재 중심건물이었던 안향청이 남아 있어 공원관리사무소로 쓰이고 있다. 이곳에도 악기창고등 부속건물이 많이 있었다. 이들 건물도 복원될 계획이다.
사직단일대가 복원되면 창경궁과 종묘를 연결하여 단일권역화하는 사업과 함께 일제가 맥을 끊어 놓았던 조선조「종묘사직」이 모두 원모습을 되찾게 된다.

<임재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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