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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고향(172)재령 이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재령이씨의 시조는 고려의 중신 이우수이다. 문하시중을 지내고 재령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재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원래 본관은 「경주」였으나 이 시기에 분관됐다.
이후 재령이씨는 고려조에 이원영(공부상서), 이근인(령동정), 이소봉(상장군)등으로 세계를 이어왔다.
이일상(중낭장), 일선(사재령)형제는 이소봉의 아들들. 공민왕의 외손이었던 이일선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가족을 거느리고 경남 밀양부 서쪽 소음리에 은거, 세상을 마쳤다.
이 신(사헌부지평)·술·축·오(두문동절신)·유·인등 6형제는 이일선의 아들들이다.
이중 맏이인 신은 공양왕때 간관 김운양등과 함께 정도전·남암등의 죄상을 탄핵하고 이성계의 추대를 반대하다 유배도중 숨졌다.

<「고려동」에 침거>
이오 또한 공민왕때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고려가 망할 것을 예견하고 두문동에 은거, 절의를 지켰으며 후에 경남 함안군 모곡리에 낙향했다. 조선 개국후 태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했다. 병조참의에 추증.
이오가 은거했던 우곡리의 옛 이름은 「고려동」. 이오는 이곳에 은거한후 집주변에 담장을 쌓았다. 그리고 「담밖은 조선왕조의 영토지만 담안은 고려왕조 유민의 거주지」임을 표방하는 뜻에서 동명을 「고려동」이라 지었다 한다. 『고려왕조의 유민이 어찌 신왕조에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은 후에도 신왕조에서 내려주는 관명은 사용하지도 말고 신주도 이곳(고려동)을 떠나 다른 곳으르 옮겨서는 안된다』
이오는 후손들에게 이같은 유명을 남겼으며 그의 아들 개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끝내 신왕조에 벼슬을 하지 않고 평생을 마쳤다.
이렇듯 재령이씨는 이성계의 신왕조에 야합하기를 거부하고 고려조에 충절을 지켰다.
이같은 사연 때문에 「재령이문」은 조선 세조∼성종조가 돼서야 출세의 관문인 과거에 응시했다.

<세조때부터 등용>
세조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홍문관부제학·예조참판등을 지낸 이맹현·중현(예조참의·홍문관부제학) 형제는 이오의 손자.
조선의 산하가 임진왜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재령이문은 구국의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홍훈(선조·군자감봉사), 이운룡(동수군통제사), 이정(지중추부사), 이숙 (동 군자감판관)등이다.
이운룡은 일찌기 무과에 급제, 선조25년 임진왜란 때 옥포만호로 우수사 원균의 군사가 중과부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전라수사 이충무공에게 구원을 청할 것을 극력 주장, 충무공의 군사와 연합, 옥포·영등포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가 광해군 때 충청수사로 좌천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
숙종조에 이르러 재령이문은 영남학파의 거유인 이휘일·현일형제를 냈다.
숙종조 이후 영남학파중심인 남인과 기호학파 중심인 서인(영수 송시열)은 「조대비의 상복기간」등 각종 예논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때 영남학파를 대표했던 중심인물이 이현일이었다. 그는 영남학파의 거두로서 기호학파를 맹공격했다.
숙종15년 「기사환국」으로 정권은 서인에서 남인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후「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 피비린내나는 정치적 보복을 단행했다. 이현일또한 함경도 홍원, 전나도 광양등에 유배되는 시련을 겪었다. 이후부터 남인은 조선조말까지 집권과는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
이휘일·현일형제는 도덕지상주의를 지향한 대성리학자였다. 현일은 형 휘일이 학문적 완성을 보지 못하고 54세로 숨지자 그의 유지를 받들어 경제학저술인 『홍범연의』를 마무리 지었다. 이현일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학행으로 추천되어 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에 까지 올랐다. 이조판서를 제수 받았을 때는 7번이나 사양했으나 임금이 허락치 않았다 한다.

<과거안보고 판서>
이현일의 모친 장씨부인은 재령이문을 소개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영남유림들은 『장씨부인은 신사임당 못지 않은 부덕·학문·예술을 갖춘 현모양처』였다고 강조한다.
『창외우소소/소소성자연/아문자연성/아심역자연(창밖에 부슬부슬 비가오니/부슬부슬 빗소리 자연스럽네/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내마음 또한 자연에 겨웁구나)』
이청담스님은 장씨부인이 출가전 지었다는 이시를 읽고 『읽으면 읽을수록 그녀의 오묘한 자연관을 느낄 수 있는 명시』라고 극찬했다 한다. 그녀는 초서의 대가로도 알려지고 있다.

<글·사진=김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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