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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땅이 정치 난투장일순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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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10대결」을 앞두고 지각있는 국민들은 걱정이 태산같다. 꼭 무슨 일이 날것만 같아불안하다. 나라의 기틀을 뒤흔드는 위험도, 그리고 몇십년 쌓아온 「정치발전」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불행한 일도 다 일어날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이 땅은 4천만의 삶의 터전이다. 몇몇 정치집단의 난투장으로 내버려 둘수는 없다.
초가삼간 다 타도 빈대 죽는것이 시원하다고 생각한다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정치투쟁을 외부적으로 한정시키는 냉엄한 현실조건 속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미국·중공·북한의 새 길이 열리고 있고 소련의 파도가 코앞에 와 있고 또한 일본의 한반도정책이 적극화하고 있는 미묘한 국제환경 속에서 우선 민족이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하는 마당에 한가롭게 정당투쟁을 지켜볼 여유가 없다.
북한이라는 위협요소가 또 있다. 우리의 정치투쟁 마당에 뛰어들어 「인민민주혁명」을 펼쳐보겠다고 새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때다. 빈대는 미워도 우선 초가삼간을 지키는일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이당의 젊은 이상주의자의 뜻대로 서둘러 「민주화」투쟁을 벌일수 없다.
개인의 인권이 존중되고 자유롭고 고른 복지가 보장되고 민주 참여의 기회가 모든 국민에게 주어지는 이상적인 한국사회를 하루 빨리 이루고 싶다는 마음은 온 국민의 공통된염원이다. 하지만 이런 이상사회건설의 첫 걸음이라는 「민주화」에 있어서도 「바른 민주화」가「빠른 민주화」보다 더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급하다고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쓸수는 없다.
이런 것에 생각이 미치면 우리는 현재의 정치파국 수습에 있어서도 「질서」와 「국민에 의한 정치의 민주통제 증대」를 함께 생각해야한다. 판을 엎어서 될일이 아니라 판을 고쳐 나가야한다는 말이다.
현존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정통성 부재에서 출발했고 또한 정통성 창출 실패때문에 지속되고 있다.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은 정부였는데 지난 7년간 정통성창출도 하지 못했다는데서 국민은 불만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다 정통정부수립 기회라 여겼던 개헌마저도 4·13조치로 뒤로 미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불만은 폭발 직전까지 치솟은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주권자인 국민의 지지를 누가 보아도 합당하게 정치권력에 연결시키지못하면 정통성 위기는 오게 마련이다. 선거로 정권을 쥐지 않은 경우에는 혁명후「효율성」을 높여 업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새로 확보하고 그때쯤 가서 국민의 신뢰를 다시 물어정권을 지속하는 절차를 밟는다. 그러나 제5공화국은 여기에서 실패했다. 정통성을 추인받을만큼의 효율척 정치를 하지 못했다.
빈부 격차도 줄이지 못했고 부조리도 척결하지 못했으며 사회 모든 영역에서의 질서도 오히려 흔들어 놓았다. 이 상황에서는 차근차근 정치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때는 늦었지만 우선 바른 민주정당의 건설부터 일을 시작해야한다. 바른 민주주의는 바른 정당정치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국민의 뜻으로 만들어진 진정한 민주정당들이 츨현해야한다. 지도자 몇사람이 만들어내는 정당으로는 민의를 수렴할수 없다.
대통령후보를 위에서 지명하는 정당을 어떻게 민주정당이라고할수 있는가. 지도자 사이에 뜻이 어긋난다고 하루아침에 당을 쪼개는 판에 어떻게 국민들이 믿고 따르겠는가. 현존 정당을 개혁해서 민주정당으로 고치든지, 아니면 새로 정당들을 만들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국민 모두가 적어도 자기 뜻을 대변한다고 믿는 당을 하나씩 갖게 되어야 정치적 갈등은 여의도국회의사당에서 해소될 수 있다. 그래야 정치가 길바닥에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
정당정치는 우격다짐의 힘이아닌 논리와 이론, 설득력으로 투쟁하겠다는 기초적 양식이 있는 정치인들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러한 기본 소양 없는 사람을 정치일선에서 배제시킬수있는 당원들의 권리가 확보되어야 정당정치는 비로소 민주주의 정치를 만들수 있게된다.
정담간의 논리의 대결은 「열려있는 언론」이 전제되어야 실효를 거둔다. 각당의 정책을 국민들이 자유롭게 평가할수 있는 마당이 마련되어야 데모같은 과격한 의사표시가 없어질수 있다.
「6·13대결」이 눈앞에 다가왔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대결이다. 양쪽이 모두 한발짝씩만 물러나 순리로 문제를 풀어나가주기를 국민의 한사람으로 간청한다.
여당은 이번 기회에 진정한 민주정당의 모습을 갖추기 바란다. 대통령지명대회를 얼마간미루고 경선하는 후보중에서 당원들이 후보를 뽑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차제에 중요정책을 당원 참여로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체제를 갖추어주기 바란다. 야당 또한 이번 기회에 집권가능한 당당한 민주정당의 모습을 갖추어주기 바란다. 몇몇 지도자의 사당이 아닌 공당임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빈대 잡겠다고 초가를 다 태우겠다는 복수심을 버리고 국민이 납득할수 있는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민주화 대안을제시하고 또한 앞으로 l0년, 2O년을 내다보는 장기적 정치발전 청사진을 내놓고 국민을 설득할 태세를 갖추어주기 바란다. 그리고 허심탄회하게 여당과 대화를 펴주기 바란다. 민주정치에서는 어느 특정정당이 승리해서는 안된다. 오직 국민이 승자가 되어야 한다. 이 기본원칙을 잘 이해해주기 바란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일수록 말을 삼가는 것이 나라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우리는 다같이 생각해야 한다. 무책임한 발언들은 혼란만 가중한다. 열번 생각하고 한번쯤 의견을 펴는 자세로 국민들은 정치의 정상 회복을 성원해야 한다.
돌아가는 길이 때로는 질러가는 길보다 빠를수 있다. 적어도 더 바를수 있다. 사태를 너무 급박히 몰아붙이지 말고 순리대로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가로운 책상에서 구름잡는 기분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정치일선의 참호 속에서 쓴다는 것을 끝으로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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