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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급발진 입증 책임, 왜 운전자에게만 묻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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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기환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기환 산업부 기자

김기환
산업부 기자

지난 8월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가던 일가족 5명이 탄 싼타페 차량이 길가에 주차한 트레일러와 충돌해 4명이 숨졌다. 당시 공개된 15초 분량의 블랙박스 영상 때문에 ‘급발진’(자동차가 운전자 제어를 벗어나 가속하는 현상)이 사고 원인으로 지목됐다. 영상에선 20년 경력의 전직 택시기사 한모(64)씨가 사고 300m 이전 지점부터 “차가 와 이라노. 아이구, 아이구, 아니다”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엔진음으로 추정되는 굉음도 이어진다. 차는 트레일러를 향해 속도를 줄이지 않고 돌진했고, 결국 4명이 숨졌다.

부산 남부경찰서는 한씨를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과실치사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19일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차량 급발진 원인을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없다’는 감정 결과를 통보받았다”고 말했다. 한씨가 “운전 중 갑자기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았다”고 진술했지만 경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터넷에선 “블랙박스 영상이 있는데도 운전자 과실이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 “프로 레이서도 저 상황에선 차를 멈추기 어렵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만약 경찰이 급발진이 사고 원인이었다고 밝혔더라도 한씨가 소송에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국내 급발진 사고 관련 소송에서 입증 책임은 원고(운전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회사보다 전문성이 떨어지는 운전자가 자신의 과실 때문이 아니란 점을 증명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연간 80~100건으로 추정되는 국내 급발진 소송에서 현재까지 운전자가 이긴 판례가 없다.

미국에선 급발진 의심 사고가 나면 운전자는 물론 제조사도 입증 책임을 지게 한다. 제조사가 원인을 밝히지 못할 경우 소비자에게 배상해야 한다. 도요타는 미국에서 발생한 캠리 급발진 사고와 관련해 리콜과 합의금, 벌금 등으로 40억 달러(약 4조7000억원)를 물어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부산 싼타페’ 사고가 미국에서 일어났다면 현대차는 사고 원인을 밝혀내느라 진땀을 뺐을 것”이라며 “한국 법은 소비자에게 너무 불리하다”고 지적했다.

자동변속기가 일반화하고 전자장치가 차량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떠오르면서 급발진 가능성은 더 커지고 있다. 소비자 권익을 강화하기 위해 자동차 제조사도 급발진 사고 원인 입증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항공기 블랙박스처럼 자동차 사고기록장치(EDR)도 운전자 행위까지 세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가다듬어야 한다. 브레이크를 밟아도 질주하는 차가 내 차가 아닐 거란 보장은 없다.

김기환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