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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가 마감시간을 넘긴 이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10호 29면

신문기자들이 신입 시절 선배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채근당하는 첫째 수칙은 아마 기사 마감시간 지키라는 것일 게다. 제아무리 금쪽 같은 특종도 마감을 넘기면 신문에 실리지 못하니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 선배들은 마감시간 다 되도록 원고지 붙잡고 끙끙대는 신참에게 “차라리 네 얼굴을 복사기에 대고 박아내서 신문에 실어라”며 놀리곤 했다. 뉴스 플랫폼이 다양해지고 통신기기가 발달한 지금은 마감이 따로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됐다. 기자들의 고단함은 덜해졌을까. 아니다. 더하면 더했지 편해지진 않았다. 특히 무게감 있는 기사라면 데스크의 채근과 완성도를 높이고 싶은 본능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이 클 것이다.


신문과 달리 1년에 네 번 발행하는 계간지는 호흡이 길다. 호흡이 길어도 엄연히 마감시간은 있다. 필자들께는 미리 여유를 두고 마감일자를 통보한다. 대개 마감시간을 지키며, 혹 늦어도 3, 4일 정도다. 그런데 내가 제작책임을 맡고 있는 계간 문학잡지 『문예중앙』 겨울호는 유달리 애를 먹었다. 당초 예정에서 보름이나 지나서야 원고가 다 들어왔다. 나는 편집장에게 “당신 얼굴을 복사해서 잡지에 실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옛날 내가 선배들에게 듣던 지청구를 그대로 했다. 편집장은 “이번 특집은 필자들이 글 쓰기를 많이 힘들어한다”며 난감해했다.


며칠 전 드디어 『문예중앙』 겨울호가 인쇄돼 나왔다. 얼마나 주옥 같은 명작들을 쓰시느라 마감마저 안 지켰나 싶은 고까운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특집기획 제목은 ‘#여성혐오_창작’. 올해 한국 문단의 가장 큰 이슈였던 문인들의 권력형 성추행·성폭행 실태를 이성미·송승언·유진목·김성중·양선형·천희란 등 여섯 시인·소설가가 작품 또는 고백 형태로 풀어낸 지면이었다. 읽다가 미안해졌고, 좀더 읽다 가슴이 아팠고, 결국 단숨에 읽어내리지 못하고 쉬다 읽다를 반복해야 했다. 쓰는 이도 고통스러웠겠지만 읽어나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작가는 30년 전 자신이 겨우 여덟 살 때 동네 골목에서 성폭행 당한 사실을 털어놓으며 문단 내 성폭력과 남성 시각 위주의 작품들에 대해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왜 남성 화자는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여성 인물을 착취하고 괴롭혀야 하는가. 왜 여성 인물은 남성 주인공의 깨달음을 위한 도구의 역할만 하면서 찬양과 학대의 대상이 되는가. … 문단 내 성폭력은 문단 위계의 수직적 구조로 인한 사각지대에서 은폐되고 묵인되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문인들은 그 사각지대에서 작가라는 권위를 이용해 비열한 폭력을 저질렀다.” 그는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고통스러운 목소리에 응답하여 변화하지 않는다면 한국 문학에 미래는 없다”고 단언했다.


“박○○ 시인이 제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간 시간이 길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코트 양쪽 소매에 끝까지 꿰어 넣지 못한 제 손을 쓰다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학부에서 시인의 작품에 대해 발표를 할 기회가 있었고, 그가 연루된 폭력사건들에 대해서도 제법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바짝 얼어붙어 졸음이 쏟아지는 척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게 전부였습니다. … 여성혐오를 발언한 수준이 아니라 범죄를 저지른 자조차 문단은 배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저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모두가 그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그와 술잔을 주고 받았습니다. 누군가는 그가 자신을 비판한 여성을 향한 모욕적인 언어를 시로 발표할 수 있도록 그에게 지면을 주었습니다.” 다른 작가는 “(성폭력)피해자들의 연대에 조금이나마 힘이 될 이야기를 쓰고 싶으면서도, 저 또한 불의에 눈감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글쓰기를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올해 10월부터 SNS에서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퍼지기 시작한 문인들의 성폭력 실태 고발은 미술계·영화계까지 번졌다. 몇몇 출판사는 문제된 시인의 시집을 출고 정지했고 어떤 문예지는 추문에 연루된 이의 그림이 들어간 표지를 황급히 교체했다. 피해자 돕기 모임이 만들어졌고 한 문인단체는 가해자를 징계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탄핵 바람이 온 대한민국을 휩쓸면서 이 문제에 대한 분노와 관심은 점차 식어가는 느낌이다. 과연 그렇게 넘길 사안일까. “문학동네(계간 문예지) 편집위원이 되고 나니, 그 모든 추근거림이 갑자기 사라졌어요”라는 강지희 평론가의 고백처럼, 문단 내 성폭력·성추행은 거의가 상·하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유형의 범죄다. 그 역사도 아주 길다. 성폭력 당하고도 거꾸로 사회에서 매장된 시인 김명순(1896~1951)을 애도하는 문정희 시인의 ‘곡시(哭詩)’ 한 구절을 인용한다.


‘이 땅이 모진 식민지를 벗어난 지도 칠십여 년/아직도 여자라는 식민지에는/비명과 피눈물 멈추지 않는다.’ 


노재현중앙일보플러스 단행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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