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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균형의 왕 #4

중앙일보

입력

<100% 지어낸 여자 이야기 2>

내가 힙합을 좋아한다고 해서 여자친구도 힙합을 좋아하길 바란 건 아니었다. 물론 한때는 그런 생각에 젖어있던 적이 있다. 한국에서 23명 정도 알까말까 한 래퍼의 두 번째 앨범 3번 트랙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를 꿈꾸었다. 그러나 살면서 곧 그것이 내 욕심임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런 여자 중에는 내 눈에 예쁜 여자가 없었다. 나는 말로는 영혼의 교감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 교감은 외모라는 토너먼트 1차 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가능했다. 나는 이런 놈이다.

이 글의 주인공인 그녀는, 예뻤다. 나의 여자친구였다. 나는 말로는 “내 눈에는 예쁘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지만 사실 다른 사람 눈에도 예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 놈들을 보며 나는 자존감을 확인했다. 니들은 안 돼. 니들이 되겠니. 하지만 예쁜 것 말고도 그녀가 가진 특별함이 있었다. 그녀가 힙합을 딱히 잘 알거나 좋아한 건 아니었다. 대신에 그녀는 ‘조던’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그녀는 에어조던 신발을 즐겨 모았고 즐겨 신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귀는 동안 그녀가 하이힐을 신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그녀와 나를 이어준 것도 마이클 조던이었다. 대학 특강을 가던 길이었다. 당시 나는 양동근의 ‘마이클 조던 날아가는 모양’이라는 가사에 꽂혀 있었다. ‘멀세이디스’의 앞 문양을 빗댄 표현이었다. 기발한 표현이었기에 나는 페이스북에 이 가사를 하루에 한 번씩 언급하곤 했다. 특강을 가던 지하철 안에서 나는 습관처럼 페이스북을 했다. “아 오늘 강의하는데 할 말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 그러자 23초 지나서 댓글이 하나 달렸다. “그럼 조던 드립치세여 ㅋㅋ" 늘 그랬듯 프로필 사진을 확대해 확인했다. 배경은 화장실이었고 에어조던5 새삥을 든 소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일종의 구매 인증샷이었다. 화장실이라는 장소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내 털어버렸다. 예뻤기 때문이다. 확실히, 나는 이런 놈이다.

페친 그녀를 현실 그녀로 만들기 위해 나는 에어조던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듬뿍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약속을 얻어낸 후 힙합 평론을 하고 있음을 신께 감사드렸다. 1월 23일은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 원래 17일에 만나기로 했지만 그녀는 굳이 조던 등 번호를 고집했다. 짜증났지만 참았다. 예뻤기 때문이다. 뭔가 부족한 신촌에서 그녀와 처음 맞닥뜨렸을 때 그녀는 마이클 조던 날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앞모습보다 옆모습을 실제로 먼저 봤다. 이 포즈를 보여주기 위해 23일을 연습했다고 했다. 황당했지만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뻤기 때문이다. 그 날 집에 들어온 나는 자물쇠가 달린 다이어리에 이렇게 적었다. “실물 레알 귀여움. 사진이 오히려 안 나오는 희한한 경우.” 다 적자마자 그녀에게서 카톡이 왔다. “얼굴이 희미해요. 짧게 만나서 그런가? 꿈처럼 느껴져.”

그 후로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매번 조던을 종류별로 바꿔 신고 나왔다. 그녀가 힐을 신지 않아 불편한 건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키 좀 작아지면 어때? 힐 신으면 발 아프잖아. 난 괜찮으니까 플랫슈즈 신어도 돼.”라는 고도의 계산된 수작이 원천봉쇄 되었다는 것. 하지만 그녀가 조던 마니아라는 사실은 나의 합리화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힙합과 농구는 뗄 수 없는 관계지. 특히 조던은 더 그렇잖아. 힙합 패션하면 조던 아니겠어. 그러니까 나는 지금 예쁘고 힙합으로도 이야기가 통하는 여자친구와 만나고 있는 거라고. 둘 다 잡았어 난!” 뒤돌아보면 진실 자체가 중요한 적은 없었다. 늘 내가 믿고 있던 게 진실이었다.

데이트를 할 때마다 나는 조던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예를 들어 힙합과 농구는 게토에서 탈출하기 위한 흑인의 ‘유이’한 꿈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랩 스타와 NBA 스타 간에는 ‘우리는 가난하고 위험한 게토에서 태어나 차별받으며 그저 그런 인생을 살 뻔했지만 이제는 인종과 국경을 초월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한 삶을 사는, 모두의 롤모델인 성공한 흑인이 되었다’는 자기 정체성이 공유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마이클 조던은 흑인의 제일가는 영웅으로 지금까지도 우상시 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티셔츠나 신발이 래퍼들의 가사에 등장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 등등.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나와 그녀는 건축학개론의 승민과 서연처럼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꽂고 넬리의 ‘Stepped On My J'z’나 마이크 윌 메이드 잇의 ‘23’같은 노래를 함께 들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당연히 조던에 대한 노래들이다. 그리고 나는 잠시 그녀가 ‘23’에 참여한 마일리 사이러스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에 비하면 마일리 사이러스는 그냥 철없고 아무 때나 혀를 내미는 여자애일 뿐이다. 위키피디아 찾아보니 92년생이던데, 92년에 태어난 주제에 조던에 대해 뭘 알겠나? 나의 그녀가 훨씬 더 예쁘고 훨씬 더 조던을 좋아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아, 그녀가 가장 재미있어하던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NBA 유니폼 이야기였다. 나는 1990년대 이전에는 딱 달라붙던 유니폼 하의가 1990년대 이후로 점차 통이 커지기 시작했고, 이것은 마이클 조던 같은 선수가 헐렁하고 기장이 긴 하의를 입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마이클 조던이 헐렁하고 기장이 긴 하의를 입었던 것은 힙합 패션의 영향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지금껏 엄마가 애원해도 안 해준 이야기였다. 그러자 그녀는 내 팔을 SES처럼 감싸 안으며 조던이 더 좋아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휴게소 우동을 좋아하고 컬러링을 바꾼 날엔 일부러 전화를 늦게 받는 그녀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던 건 물론 맞다. 나와 만나고 들어온 날엔 수첩에 하트를 치고 병신들이 번호를 물어보면 내 사진을 꺼내 보여주던 그녀가 내 전부였던 것도 맞다. 문제는 그녀와 함께할수록 내가 점점 더 외로워졌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반짝일 때 나는 우주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최강의 사랑스러움과 최악의 감정 기복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전자와 후자의 빈도는 1 대 9였다. 조던 5를 신을까 조던 11을 신을까 고민하다 1시간이 늦는 건 참을 수 있었다. 조던을 실수로 스쳐 밟았다고 펄펄 날뛰는 것도 당연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가 힘들 때는 둘이서 이겨내고 내가 힘들 때는 나 혼자서 이겨내야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가끔 힘이 들어 의지하고 싶을 때 그녀는 늘 자신의 감정 기복으로 이미 먼저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녀를 탓하진 않았다. 예민하게 태어난 건 그녀의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에 나는 그녀를 떠났다. 9월23일이 우리가 헤어진 날이다. 이번에는 우연이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 나는 외로워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와 사귈 때에도 나는 이미 외로웠다. 집에 있는 조던은 내다 버렸고 시카고 불스의 전패를 바랐다. 과소비로 삶을 견딜 때도 있는 거라며 2주 만에 300만 원 정도를 쓰기도 했다. 아침마다 일어나자마자 라디오를 켜는 습관도 생겼다. 혼자 있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아픔은 무뎌졌다. 하지만 아침마다 라디오를 켜는 습관은 여전히 버리질 못했다. 다른 여자를 만나고 일로 성공을 거두어도 어째서인지 삶의 고독은 갈수록 커지기만 했다. 이걸 삶의 숙명이라고 처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바로 그날, 나는 라디오에서 그녀의 근황을 들었다. 해외토픽 시간이었다. “1962년에 우리 대한민국과 수교를 맺은 바 있는 중동의 국가 요르단(jordan) 소식입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요르단의 왕비가 되어 있었다. 라디오에 따르면 나와 헤어진 후 바로 마이클 조던 날아가는 모양으로 요르단에 날아간 그녀는 기회를 엿보다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에어 요르단으로 바꾸었고 국기 역시 마이클 조던 날아가는 모양으로 개정했다. 65세 이상 노인 전원에게 에어조던5를 무상지급하는 것은 물론 현재 마이클 조던의 귀화를 추진 중이라고 했다. 나는 한편으로 황당했지만 한편으로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해냈구나. 그럴 줄 알았지. 넌 내 여자였잖아. 멀리서 응원할게. 너는 내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던 사람이었으니까.

* 이 글은 의심의 여지없이 모두 허구다.

<크리스마스 분쇄>

다음은 2015년 12월 19일, 연합뉴스에 올라온 기사다.

(서울=연합뉴스) 김지헌 기자 = 크리스마스를 쓸쓸히 홀로 보내야 하는 일본의 독신남들이 분노에 찬 집회를 벌였다. '혁명적 비(非)인기 동맹'(革命的非モテ同盟)이라는 단체에 속한 남성 20여 명은 19일 일본 도쿄 시부야 거리에서 "크리스마스 분쇄! 연애 자본주의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했다.

이들은 "크리스마스는 자본주의의 음모이며 독신자를 차별한다. 이 세상에서 돈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로부터 빠져나가고, 행복한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지지한다"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끽하는 연인·가족 쇼핑객들 옆을 행진했다. 상업화된 크리스마스에 대한 반감은 물론 '사랑받지 못하는 남성'에 대한 지지도 집회의 주요 주제였다. 실명을 밝히지 않은 이 단체의 대표는 "여자친구가 없거나 결혼하지 못한 인기 없는 남성은 무척 차별받는다. 우리는 이런 장벽을 부수고 싶다"고 AFP통신에 말했다.

이들은 지난 12일 홈페이지에 올린 집회 예고 글에서 '연애나 일에 충실한 사람'을 뜻하는 일본 신조어인 '리아쥬'(リア充·리얼충)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리아쥬는 폭발하라!"는 등의 구호를 올렸다. 또 "거리에서 염장 지르는 것은 테러 행위다. 테러와의 전쟁을 관철하자"며 공공장소에서 일어나는 연인들의 애정 표현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언론 취재 가능성이 있으니 출석이 드러나는 것이 좋지 않은 사람은 마스크나 선글라스 등을 지참하기 바란다"는 지침도 내렸다.

이 단체는 밸런타인데이 등 서양에서 들어온 기념일에 맞춰 반대 시위를 전개해왔다. 일본에선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은 아니지만 주로 연인들을 위한 낭만적인 날로 인식되며,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는 사람도 많다고 AFP는 전했다.

당연히(?) 빵 터지는 기사이긴 하지만 마냥 웃고 넘길 수만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기사의 남자들처럼 '크리스마스 분쇄!'까지 외칠 생각도 없다. 누군가가 크리스마스를 즐길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것 자체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아니지 않나.

그러나 크리스마스를 즐길 자유가 있다면 크리스마스에 무심할 자유도 존중받아야 한다. 대세에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자기의 타임라인대로 움직이는 사람에게 이 사회는 여전히 오지랖이 넓다. 나는 아직도 싸이의 신곡을 듣지 않았고, 응팔도 본 적이 없다. 이유는 명확하다. 관심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보고 즐긴다 해도 나에게 관심 밖이면 소용이 없다.

하지만 응팔로 도배된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보며 다른 사람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냥, 나에게는 좀 '불운' 정도다. 어쩌다가 이번에는 다수가 좋아하는 것과 나의 기호가 불일치했을 뿐이고, 나는 이 시기를 그저 흘려보내면 될 따름이다. 그러다가 어떨 때는 또 내가 흥미 있는 글로 페이스북 타임라인이 가득 채워진다. 그냥, 그런 것이다.

다른 나라, 다른 사회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 사회에는 더 많은 개인주의가 필요하다. 남이 무얼 하던 자기 잣대로만 판단하지 말 것. 함부로 끼어들지 말 것(물론 누군가가 쓰러져 있거나 위급하다면 당연히 끼어들어야 한다). 그리고 타인이 요청할 경우 조언과 도움은 주되 동정하거나 폄하하지 말 것.

나는 요즘 '합리적 개인주의자'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또 종교든 무엇이든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대신 개인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동기로 작용하는 세상을 상상한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크리스마스를 즐기든 즐기지 않든 스스로 괜찮다면 되었다. 적어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남의 시선 때문에 불행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연남동 카페 ‘아지토’에는 이미 캐럴이 가득 흘러나오고 있다.


작가 소개    
대중음악 평론가, 혹은 힙합 저널리스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네이버뮤직>, <카카오뮤직>, <에스콰이어>, <씨네21> 등에 연재 중.
레진코믹스 힙합 웹툰 <블랙아웃> 연재 중.
<서울힙합영화제> 기획 및 주최.
<건축학개론>을 극장에서 두 번 봤고 두 번 다 울었음.

주요 저서 및 역서
『한국 힙합, 열정의 발자취』,
『힙합-우리 시대의 클래식』,
『힙합-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
『나를 찾아가는 힙합 수업』
『제이 지 스토리』,
『더 에미넴 북』,
『더 스트리트 북』,
『더 랩: 힙합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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