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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디자이너 정미 대표 "한국의 빛은 비빔밥 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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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디자이너(Lighting designer)는 ‘연빛술사’다. 빛으로 공간을 창조한다. 디자이너가 선택하는 빛의 명도와 채도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조명 디자인에는 조명 기구 디자인, 무대 디자인, 이벤트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가 있지만 최근 새롭게 주목받는 테마는 '사회적 조명'이다. 빛으로 도시의 안전을 확보하거나, 도시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드러내는 작업을 말한다. 지난 11월 2~4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국제도시조명연맹총회(LCUCI)는 이러한 사회적 조명의 중요성과 의미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서울의 밤 풍경을 빛으로 바꾸고 있는 조명 디자이너 정미 이온 SLD대표. 김상선 기자

서울의 밤 풍경을 빛으로 바꾸고 있는 조명 디자이너 정미 이온 SLD대표. 김상선 기자

이 회의에서 한국의 빛을 주제로 강연했던 정미(52) 이온 SLD대표를 지난 달 29일 만났다. 그는 서울의 밤 풍경을 빛으로 바꾸고 있는 국내 1세대 조명 디자이너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서울 야간 경관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국보 1호인 숭례문 야간 조명 작업에 참여했다. 그 외에도 남산 N타워와 제 2롯데월드, D타워 등 서울의 랜드마크 빌딩 조명 작업을 해왔다.

정 대표는 서울의 빛을 ‘비빔밥 빛’이라고 표현했다. 달밤에 고궁에서 느낄 수 있는 고요하고 안락한 빛과 강남 도심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간판들이 주는 역동적 빛이 공존하는 도시라는 의미다. 그는 "비빔밥 재료들이 적절한 비율로 섞여야 최상의 맛을 내듯 다양한 빛도 서로 균형을 맞춘 상태일 때 최상의 우아한 빛이 탄생한다"고 말했다.

조명 디자이너란 어떤 직업인지 궁금합니다.
빛으로 공간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조명 공간 감성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예술과 과학기술이 중첩된 분야에서 일하는 직업입니다. 쉐프들이 요리를 할 때,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음식재료가 있고 자신만의 맛을 내려고 톡톡 치는 조미료가 있잖아요. 빛이 그런 역할을 합니다. 어떤 빛을 쓰냐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조명디자이너는 빛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추억에 남는 장소를 만듭니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요구는 달라집니다. 조명 디자인은 어떤 변화를 거쳤나요?
빛의 일차적 기능은 어두움을 밝혀 사물을 인지하도록 하는 거예요. 생존을 위한 빛인 거죠. 산업혁명 이후로는 낮을 연장시켜 밤에도 노동을 하기 위해 빛이 필요했습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조명이 발달했죠. 현대에 오면서 과도한 업무로 생체리듬이 흐트러지는 등 사회적 질병이 생기면서, 쉼을 위한 빛을 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감성적 빛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어요. 한 줄로 요약하자면, ‘제품 생산력 향상’을 위한 조명에서 ‘인간 중심’ 조명으로 변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인상 깊게 하신 작업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최근 한 작업은 롯데월드 타워에요. 설계기간만 6년이 걸렸습니다. 세 가지 주체를 모두 만족시켜야 했습니다. 기업, 공군, 그리고 시민. 한여름과 한겨울을 견딜 수 있으면서 123층 555m라는 초고층 빌딩 설계에 맞춰 조명을 디자인 한 것이 워낙 까다로웠습니다. LED는 직진성이 있는 빛인데 눈부심 때문에 공군 항로가 방해될까봐 모든 빛이 앞으로 나가면서도 눈부시지 않게 디자인하느라 각별히 신경 썼습니다. 작업하는 중에 서울시 빛공해 방지 조례가 생겼어요. 송파구 주민들에게 피해가지 않도록 섬세하고 은은한 빛이 되도록 디자인했습니다. 작업을 할 때에는 힘들었지만 조명 디자이너로서 소중한 경험적 자산이 된 것 같습니다.
조명 디자인을 할 때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빛이 ‘적재적소’에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꼭 필요한 곳에만 빛을 절제해서 쓸 때 공간이 우아해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간접조명 트렌드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산업화되면서 눈이 인공 빛에 익숙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직접 눈으로 들어오면 망막을 자극해 자극적이 되죠. 실제로 좋은 라이팅 기구들을 보면 표면에서 은은하게 나오면서 빛만 존재하도록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접조명이 비췰 때 편안함과 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서구와 우리가 빛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조명디자인은 유럽에서 제일 먼저 시작했어요.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에펠탑과 그 빛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고요히 흐르는 센 강을 상상해 보세요. 빛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샹젤리제 거리도 떠올려 보세요. 유럽은 조명이 경관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았던 곳이고, 그 중에서도 태양빛이 적어 실내조명이 필요했던 북유럽에서 특히 발달했습니다. 선비 문화 영향권에 있었던 우리는 굉장히 자연친화적이고 절제된 빛을 썼습니다. 달밤의 고궁을 거닐면서 느껴지는 빛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독일과 프랑스, 일본 도시의 겨울 빛축제 영상]

한국적 빛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만이 가진 빛의 매력은 어떤 것인가요?
우리는 서구의 빛과 고유의 빛을 잘 결합해 독특한 ‘한국적 빛’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빛은 ‘비빔밥 빛’입니다. 다이내믹하면서도 정온합니다. 우리는 세계 어디보다 크고 번쩍이는 간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공해 요소로 볼 수도 있지만 간판과 십자가 조명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느끼는 하나의 심볼이에요. 그런가 하면 정온한 면도 있어요. 한국적 빛의 프로포타입은 호롱불이에요. 예전에 FIFA 월드컵 때 청사초롱으로 데코를 했는데, 해외귀빈들이 너무 예쁘다고 하나씩 다 집어 갔습니다. 거기에다가 빛공해 방지조례가 있는 유일한 나라에요. 절대로 과하게 빛을 쓸 수 없습니다.
'비빔밥 빛'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이 빛의 아름다움을 조명 디자이너들은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요.
다이내믹한 빛과 정온한 빛을 적절히 요리해 아름다운 ‘서울의 빛’을 만들도록 적재적소에 빛을 둬야 해요. 그래서 관광객들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더 머무르고 싶은 장소로 만드는 것이 조명 디자이너의 책무입니다. 한국의 빛은 문화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밤빛 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대표님께서 하신 작업을 보면 도시경관을 디자인하신 것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기억에 남는 작업 두 가지가 있어요. 국보 1호 숭례문 야간조명을 디자인 한 것과 을지로 라이트웨이 프로젝트를 한 것입니다. 빛으로 도시공간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작업입니다. 을지로 라이트웨이는 도시 낙후지역에 빛을 설치함으로써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을 마련한 것인데요. 이 작업을 하면서 빛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빛을 통해 하나의 문화가 탄생하고, 공간이 변하면서 하나의 공동체가 생기는 것. 이것이 진정한 도시재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11월 2일부터 4일까지 국제 도시 조명 연맹 총회(LCUCI)가 DDP에서 개최했고, 내년에는 서울에 총회가 생기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회적 조명이란 관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적 조명은 도시 안전을 위한 빛과 도시의 야경을 디자인하는 것으로 크게 나뉩니다. 뉴욕과 도쿄의 스카이라인이 밤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조명 때문이죠. 도시의 아름다움을 밝히는 빛에 대한 논의는 이제까지 우리끼리만 한 거였어요. 이번에 세계적인 조명 디자이너가 한자리에 모이면서 서울의 빛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조명 디자인 관련 마켓은 이미 하나의 시장으로 형성되어 있어요. 내년에 아시아 지국이 서울에 생기면 한중일 조명 시장이 더 확대되리라 기대합니다.
조명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가요?
조명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합니다. 개인적 조명부터 도시적 조명까지 스마트하게 움직이는 빛을 IoT와 접목해서 조명을 제어하는 기술이 앞으로 유망합니다. 아직 조명디자인 학과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배울 곳이 없어요. 제가 회장으로 있는 조명협회에서는 이런 어려움을 해소하려고 몇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만 원을 내고 자유롭게 강의를 듣는 ‘10000day 프로그램’이나 밤에 함께 모여 도시를 거닐며 올바른 빛을 찾아다니는 ‘나이트워킹’ 같은 오픈 강좌를 들으며 조명 디자이너의 꿈을 키워나가세요.
조명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아직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아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인데 단순히 기술 노동자로 보시면서 파트너가 아닌 갑을 관계로 대할 때 힘듭니다. 또 무조건 외국 디자이너를 선호할 때에도 좀 섭섭해요. 초고층 건물을 지은 경험치 면에서는 월등히 높은데도 말이죠. 일본은 자국 디자이너를 선호하는데 우리는 정반대입니다. 조명 디자이너로서 가져야 하는 직업병도 있어요. 밤에 빛을 봐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잔상이 남아 굉장히 눈이 피로합니다.
마지막으로 조명을 활용한 일상 인테리어 팁에 대해 독자들에게 이야기해주세요.
집은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사적 공간이에요. 옐로우톤의 간접조명을 활용해 휘게(hygge)한 공간으로 만들어 보세요. 우리 몸은 달빛 별빛을 보면서 느꼈던 편안함을 기억합니다. 에너지 소모가 많은 할로겐램프가 인기가 있었던 것은 그 빛을 보며 ‘별이 빛나는 밤’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간접조명은 인공 빛이 직접 눈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은은한 분위기로 공간을 감싸줍니다. 리조트나 호텔에서 옐로우톤 간접조명을 활용하는 이유도 달빛 별빛이 주는 포근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함이에요.

12월은 빛의 달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간직한 빛은 어떠한 빛깔입니까? 따스한 온기가 가득한 사랑의 빛을 이번 12월에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김유빈 기자 kim.yoov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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