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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원 과태료, 말도 안 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선진 여러 나라의 행정패턴이 규제일변도에서 조장행정으로 탈바꿈한지는 오래되었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행정의 대상인 국민의 의식수준이 크게 향상된 데다
행정이 추구하는 이념과 목적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교육의 대상인 학생이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유치원이나 국민학생 다루듯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런 일도 없을 것이다. 대학생의 언행과 태도에 대해 일일이 참견하고 벌을 세우거나 손을 잡고 끌고 다닌다면 졸렬한 교육일수밖에 없다.
그런 유치한 교육 아닌 행정이 우리 주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교통부가 오는 7월1일부터 홀수와 짝수번호 운행 위반차량에 대해 50만원의 과태료를 물리기로 하는 내용의 자동차관리 특례규칙을 새로 만들어 입법 예고한 것도 이런 부류에 해당된다. 홀수와 짝수운행을 시민에게 요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협조」사항이다.
홀·짝수제는 원래 민방위훈련이나 올림픽 등 행사 때 차량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 교통마비로 행사에 지장을 주게 되어 당국이 고심 끝에 고안해낸 제도 아닌 제도다.
이 제도가 무슨 법적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찬반의견을 들어 국민적 합의로 마련된 제도도 아니다. 따라서 이 제도는 그 필요성을 양해한 시민의 자발적 호응으로서만이 실시될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행정관청은 홀·짝수 운행으로 불편을 감수하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의당 죄송하다는 뜻을 전하고 이에 협조해준 시민에게는 감사의 뜻을 전해야할 성격의 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나「죄송」의 뜻은 고사하고 되레 과태료까지 물리겠다는 관료적 발상이 나왔으니 어찌된 영문인가.
도로망 확장은 게을리 하면서 차량은 무제한으로 늘려놓고 교통이 폭주하게 되니까 기껏 생각해 낸다는 게 홀·짝수 운행이었고 거기에 한술 더 떠서 50만원의 과태료 징수라는 발상인가.
10만원도 못 받는 중고차가 수두룩한데 한번 운행으로 50만원을 물리겠다는 착상을 한 관리들의 정신상태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과태료는 전과기록에 오르지 않을 뿐 불이익을 받는 금전벌이라는 점에서는 벌금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 때문에 과태료 부과결정은 사법적 판단에 맡겨져야 하며 과태료 액수도 형평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이는 행위에 비해 무거운 양형을 적용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홀·짝수 운행 위반행위가 어느 만큼 질서를 어지럽히고 반도덕적인 행위인지는 모르나 50만원 부과는 형평성 원리에도 크게 어긋난다.
「질서」확립을 위해서는 과태료를 높게 매기는 게 상책이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이 세상의 모든 범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좀도둑이든, 소도둑이든, 주먹 한번 휘두른 범죄도 몽땅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으로 다스리면 될 게 아닌가.
교통부의 이번 발상도 세상만사를 법으로 다스리고 국민을 다스림의 대상으로 여기는 법만능주의와 그리고 권위와 독선에 찬 관료행정의 폐습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현행 비송사건 절차법에는 모든 과태료는 관할법원의 재판절차를 밟아 법관의 판단으로 부과결정토록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행정관청은 이 법률을 무시하고 행정처분으로 부과결정토록 특례규정을 감쪽같이 신실해 두고 연례행사처럼 천정부지로 과태료 인상만 거듭하고 있다.
이같은 특례규정 신설이 헌법위반이라는 논란도 있어 어차피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안이지만 이번 교통부의 과태료인상과 짝·홀수위반 과태료 신설은 원점에서부터 검토되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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