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의, 「언로」와 오늘의 「언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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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뒤 내란과 외침이 잇달아 백성들은 고달프기만 했다.
거듭되는 내우외환으로 민생은 엉망인데도 조정은 당파로 분열되어 싸움만 일삼고 있었다.
이때 「초야의 현사」로 천거돼 사헌부 장령(장령)으로 부름을 받은 강학년이 버슬을 사양하며 상소를 올렸다.
『…전하께서 반정한 조처는 세상에 드문 처변이라 백이가 있었다면「사나운 것으로써 사나운 것을 바꾼다」는 나무람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옴니다. 전하께서는 보통슬기의 천품밖에 안되는데도 올바르게 보좌하는 신하가 없으니 자질구레하게 살피는 것을 밝다고 생각하시어 말단 사무에만 부지런하고 국사가 글러지고 국론이 분열되어 위태롭게 어지러운데도 구하지 않나이까. 원하옵건데 전하께서는 위로 종묘사직의 중함을 생각하고 아래로 자손의 보전을 생각하소서. 환히 뉘우쳐 깨달으시고 두렵게 크게 놀라시어 어제의 전하가아니게하면 일식에 그 빛이 다시 밝아짐 같이 위태로움을 돌려 편케할수 있으니 그 시기를 잃지마옵소서…』
반정으로 임금이 된 인조에게 반정자체가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고 꼬집으며 그렇기에 더욱 선치를 하여 반정의 명분을 세워야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한낱 외로운 초야의 서생이 임금의 자질문제와 왕위의 정통성까지 들먹이면서 큰 치도를 이루어나갈 생각은 않고 시시클콜한 일을 따지며 능한체하고 있는 것을 여지없이 비판한다.
지혜 없는 통치자가 말단관리의 소관사항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크게 밝은체하는 폐단을 나무라는 이두려움 없는 비판은 카리스마를 인정하지않는 오늘의 민주사회 감각으로도 놀랄만한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다. 이 상소를 본 인조는 이렇게 비답을 내렸다.
『소(소)를 살펴 갖추어 알았고 너의 충직한 언론을 가상하게 여긴다. 천하에 변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또한 일할 수 없는 때가 없다. 굳이사양하지말고 속히 올라와 성심에 부응하라』
그러나 예나 이제나 권력 주변 무리들의 속성은 마찬가지인듯 반정을 주도했던 이른바 공신들은 입에 침을 튀기며 강홍년을 탄핵하고 나섰다. 『거만스럽게 소를 올려 「포학한 것으로써 포학한 것을 바꾼다」는 무례한말까지 하니 머리털이 곤두섬을 깨닫지 못했사옵니다. 나라에서 부르는데 도리어 인퇴하면서 스스로 높은체하며 방자한 말이 거리낌 없사옵니다. 이처럼 임금을 업신여기고 세상을 속이는 무리는 엄중히 따져 함부로 논의하는 버릇을 징계해야 하옵니다』
인조는 아첨배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강홍년을 감샀다.
『그의 의견이 그러했기 때문에 숨김없이 아뢴 것이다. 정도에 맞지않는논의는 아니었으니 무엇이 해로우랴』 나중에는 사간원에서까지 충성 경쟁을 벌여 강홍년을 처벌해야 한다고들고 일어났으나 인사는 여전히 그를 두둔했다. 이점만으로도 인조는 「보통슬기의 천품」은 넘는 자질의 임금이라해야 옳겠다. 바로 3백60여년전 우리 선인들의 얘기다.
고려조이후 우리 왕조의 임금들은 일견 절대권력을 가졌었지만 그렇다해서 그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수는 없었다.
권력의 남용이나 정도를 벗어난 독주가 있을 때는 조정의 벼슬아치를 비롯해서 성균관의 대학생과 시골 선비는 물론 천한 기녀에 이르기까지 백성이면 누구나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려 치정의 옳고 그름을 따질수가 있었고, 또 그렇게 했다.
『백성이란 죽일수는 있어도 이길수는 없읍니다』 『나라 다스리는 길은 마땅히 민심과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어찌 예전에도 없는 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을 놀라게 하나이까』『왕자가 이익을 탐내면 백성들은 도둑질을 합니다』 『언노를 막고 어찌나라가 성합니까』 『형벌을 삼가고 구제의 길을 택하소서』 ….
신하와 백성이 임금에게 올렸던 「옳은 소리」는 이렇듯 거리낌이 없었다.
조정에는 아예 언관을 두어 임금의 몸가짐과 마음씀에 이르기까지 거슬리는 말을 끊임없이 하도록 제도화했다.
언관들이 간하는 말은 비록 잘못된 것이라해도 함부로 벌을 주지 않았고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 할지라도 말의 출처, 곧 언량을 캐지않는 것을 임금의 도량으로 여겼다.
언근을 캐고 간하는 사람의 말꼬투리를 잡아 벌을 주면 언노가 막히고, 언노가 막히면 나라가 망한다고 여겼다.
고려조 무신의 난과 몽고 침략의 혼란기, 그리고 조선조의 연산·광해같은 폭군의 독재기간을 빼곤 이러한 제도는 면면히 이어져왔다. 특히조선조에서는 5백년에 걸쳐 틀잡힌 여론정치의 전통으로 형성됐다.
언관과 상소제도는 오늘의 언론 구실까지 겸하여 민의에 따라 정치를하게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한말의 절대권력자 대원군을 실각케한 발단도바로 선비 최익현의 상소문이었던 것만 보아도 이 제도가 얼마나 과감하고 적극적인 언론이었던가를 짐작할수 있다.
나라의 현안과 국민의 의사가 이를 통해 표출되고 찬반의 여론이 수렴돼 조정의 공론이 정해지고 정책의 향방이 결정됐던 것이다. 우리나라 왕조 통치가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보다 유독 오랜 기간 권력을 유지할수 있었던 원인도 이런데 있지 않나 생각된다.
요즘 4·13조치와 교수·성직자·예술인들의 잇단 시국선언, 그리고 김영삼총재의 발언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국논 양분의 상황을 보면서 우리 정치인들의 지혜가 바로 수백년전 왕조시대 선인들의 수준에도 훨씬 못미치는 것만 같아 창피하고 안타깝다.
문제의 제기나 개선의 주장이 수렴돼 공론으로 승화되고 그에 따라정책이 결정되기는 커녕 거꾸로 끗발 쥔 쪽의 주장만이 일방적으로 강요된다. 그에 대한 비판이나 반대는 적대시되고 불온시되어 억압의 대상으로만 간주되는 정치·언론 상황은 왕조시대보다 도리어 뒤지고 있다는 느낌마저 금할수 없다.
곧은 말하는 용기가 상독되고 귀에 거슬리는 말도 기꺼이 들어주는 금도의 정치가 아쉬운 오늘이다.
이 답답한 석기인들의 정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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