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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서치 바탕으로 한 ‘계산된 열정’으로 리스크 관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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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호 20면

2008년 9월 15일 파산한 리먼브러더스의 직원들이 미국 뉴욕 본사 건물을 나서고 있다. 리먼의 몰락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골드먼삭스는 이듬해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냉정하게 리스크를 계산한 뒤 한국 금리 상승에 베팅해 큰 수익을 냈다. [중앙포토]

지난달 ‘아웃사이더’ 도널드 트럼프는 ‘반 기득권층’의 깃발을 내걸고 분노한 백인 소외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트럼프는 정부 각료 인선에 있어 예상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의 지지층을 대표한다고는 보기 어려운 월스트리트의 고위직 인사들이 경제 관련 주요 직책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트럼프가 선거일 직전까지 광고를 통해 공공의 적으로 비난했던 투자은행 골드먼삭스 출신들을 대거 영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리스크(금융상품의 가격이 변해 이익이나 손실을 보게 될 위험)를 감수하는 트레이더 출신으로 고위직에 올랐다.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 내정자는 모기지(주택담보채권), 앤서니 스카라무치 정권인수위 집행위원은 대체 투자(주식·채권을 제외한 부동산 등 투자),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상품(commodity)을 트레이딩했다. 리스크의 감수·관리는 투자은행에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역량임은 물론이고, 특히 골드먼삭스에서 고위직에 오르려면 반드시 입증해야 할 개인적 역량인 것이다.

[고객들과 정보 공유해 든든한 우군 확보]

골드먼삭스의 트레이딩 룸 [사진 블룸버그]

2010년 12월 어느 날, 필자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시장이 예상과 달리 움직여 보유하고 있던 한국과 호주 채권 리스크의 손실이 급속히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트레이딩을 시작했던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가장 가슴 졸였던 순간이다. 한때 심각하게 손절매를 고려했지만, 리스크를 유지하기로 했다. 내 생각을 콘퍼런스 콜을 통해 글로벌 헤드에게 설명했다.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리스크를 두 배로 늘리도록 하자. 나도 같은 리스크를 일부 감수하겠어.”


결과적으로 그 후 약 6개월 동안 이 거래로 큰 수익을 거뒀다. 덕분에 그 해 목표 수익을 조기 달성할 수 있었다. 이 거래는 외부인의 관점에서 보면 리스크의 규모, 하루 손익의 변동 폭, 초기 누적 손실 등의 측면에서 무모해 보일 수 있다. 그들에겐 ‘무모한 열정’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골드먼삭스에서 이것은 ‘계산된 열정’이었다.


열정의 출발점은 리서치팀과의 협업이었다. 당시 금융위기 이후 계속 하락하던 한국과 호주의 금리는 2009년 3분기 양국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을 시작하면서 상승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금융기관은 한국은행의 보수적 성향을 근거로 그 다음 달인 2011년 1월의 금리 인상은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 반면에 골드먼삭스 글로벌 리서치팀의 이코노미스트들은 양국 경제 전망을 근거로 당시 2.5%였던 한국의 기준금리는 4.75%인 호주의 기준금리에 비해 너무 낮고, 한국은행의 1월 금리 인상 가능성이 50% 이상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분석을 근거로 필자와 한국 담당 이코노미스트는 중기적으로 한국 금리의 상승이 호주보다 더 클 것으로 예상했고, 한국과 호주 채권으로 적합한 리스크를 감수할 것을 권고하는 리포트를 작성해 해외 오피스와 주요 고객에게 보냈다. 리포트는 특히 런던의 헤지 펀드 고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어 많은 고객들이 거래에 동참했다. 고객들이 골드먼삭스와 동일한 리스크를 감수한 것이다.


필자는 이코노미스트·영업담당자와 함께 매년 정기적으로 뉴욕·런던·홍콩·싱가포르를 방문해 주요 고객들과 의견을 나눴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30분의 이동시간을 두고 1시간씩 미팅을 가졌다. 미팅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이코노미스트가 경제 전반에 대한 분석과 중장기 예측을 발표한다. 그 다음으로 필자는 이코노미스트의 분석과 예측을 바탕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고객의 질문이 쏟아지고 열띤 토론이 펼쳐진 후, 아이디어에 공감하는 고객은 동석한 영업담당자에게 그 자리에서 주문을 내기도 한다.


이와 같이 리서치에 기반을 둔 리스크 감수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92년 영국의 파운드 평가절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부분은 영국의 파운드화를 팔아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린 헤지펀드 매니저 조지 소로스만 기억한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당시 골드먼삭스의 영국 담당 이코노미스트 데이비드 모리슨이 작성해 중요한 고객에게만 보낸 리포트가 있었다. 골드먼삭스는 물론이고 조지 소로스를 포함해 이 리포트를 받은 헤지 펀드들이 모두 함께 영란은행의 파운드화 절하에 베팅을 한 것이다. 이렇게 골드먼삭스의 리포트는 자사의 자발적 리스크 감수에 자신감과 신뢰를 더욱 높여주는 것은 물론, 고객이 공감할 경우 동일한 리스크 감수에 나서도록 이끌어 든든한 우군을 확보하도록 도와준다. 많은 우군이 힘을 더하면 리포트가 제시한 방향으로 시장이 움직일 확률과 파괴력은 당연히 더욱 커진다.


계산된 열정으로 리스크를 감수했다면 이제 감수한 리스크는 냉정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아까 언급한 한국과 호주의 채권은 전사적 시스템에 입력돼 실시간으로 관리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유한 상품의 ‘현재 가치’가 얼마인지 매일 정확하게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시가평가(mark to market)’의 문제이다. 정확한 시가평가는 복잡한 상품일수록, 시장에서 거래가 잘 되지 않는 상품일수록 쉽지 않다. 잘못된 시가평가는 잘못된 리스크 측정, 잘못된 손익 계산, 잘못된 회계 처리 그리고 잘못된 성과 보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골드먼삭스는 ‘상상하는 가격에 시가평가 하지 말라’는 철칙이 있다. 시장 가격을 추측하지 말고 반드시 시장에서 실제로 팔거나 살 수 있는 가격으로 평가하라는 것이다. 결국 보유한 상품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평가하는 셈이다.

[매년 인력 5% 솎아내는 조직관리]
2008년 말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면서 국내 은행들이 급격한 달러 가뭄을 겪을 때였다. 달러가 부족하게 되자 국내 은행들은 국내 원·달러 외환 시장에서 달러를 조달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국내외의 원·달러 선도환율(미래 특정 시점에 두 통화를 서로 교환하는 환율)이 괴리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미미하게 시작돼 대다수의 은행들은 이를 무시하거나 감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필자는 보유하고 있던 원·달러 선도환(미래 특정 시점에 두 통화를 서로 교환하는 거래)을 회사의 원칙에 따라 국내와 국외를 구분해 정확하게 시가평가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발견했다. 덕분에 관련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줄임으로써 향후 극단적인 가격의 움직임에도 큰 손실을 피할 수 있었다. 엄격한 시가평가는 금융위기 이전 골드먼삭스가 미국 모기지 시장의 붕괴를 미리 감지하고 리스크를 줄여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정확한 시가평가를 위해 시장 가격을 찾는 과정에서 시장의 변곡점을 간파한 것이다. 바로 냉정한 리스크 관리의 결과다.


우리나라는 대형 증권사임에도 불구하고 리스크와 손익 관리가 부실한 경우가 많다. 자신의 리스크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것이 어렵고, 정확한 일일 손익을 알 수도 없다. 경영진에게 보고할 때도 추측을 바탕으로 한 숫자가 보고된다. 공식적 월별 손익은 다음 달 초 재무부서의 결산이 끝나고 각 부서별로 전달된다. 매일 추측과 실제 손익의 차이가 누적되면 월별 총 손익의 차이는 더욱 커진다. 심지어 차이가 난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게 이런 리스크 관리 시스템이다.


냉정한 관리는 개인의 성과 평가와 보상에서도 잘 나타난다. 모든 직원은 ‘360도 성과 평가 피드백’을 받는다. 자신의 직속상관은 의무적 평가자이고, 그 외에 자신이 직접 선정하는 상급자, 동료, 하급자 그리고 직속상관이 추가로 선정한 사람에게 평가를 받는다. 가까이는 옆자리의 동료, 멀게는 해외 오피스의 업무 관련자까지 적게는 10명 많게는 20명의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다. 평가의 결과에 따른 보상은 매우 엄격하다. 물론 금융업의 특성상 재무적 성과가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돈 버는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정치력이 있고 리더십이 있어도 생존하지 못한다. 아무리 많은 수익을 올려도 한번에 옷을 벗게 되는 경우도 있다. 바로 규제나 내부 규율을 위반하는 경우다.


결과적으로 골드먼삭스에서 성공하려면 규제는 하늘이 두 쪽 나도 꼭 지켜야 하고, 내부에 적을 만들지 않고 모든 사람과 두루 잘 지내고, 수익을 올려야 한다. 성과 평가의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회사는 냉혹해진다. 매년 성과 평가의 결과에 따라 하위 5%에 속하는 직원은 ‘특별 관리’ 대상이 된다. 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되면 어떻게 자신을 개선할 것인지에 대한 목표와 방법을 매니저와 정하고 주기적으로 상황을 보고하는 미팅을 해야 한다. 하지만 결국은 자의반 타의반 회사를 떠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평균적으로 매년 5%의 직원이 줄거나 신규로 교체되는 것이다.


투자은행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 성공 요건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리스크 감수 그리고 냉혹하리만큼 철저한 사후 관리로 요약된다. 우리나라도 최근 대형 증권사를 육성하는 방향으로 정책적 노력을 펴고 있다. 한마디로 자기자본을 키워 리스크를 늘리라는 것이다. 수수료가 아닌 자본 이득을 올리는 영업 모델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리스크를 늘리기 이전에 충분한 리서치를 하고, 늘어난 리스크를 철저히 관리하는 조직 문화·시스템 개발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정혁전 골드먼삭스은행 서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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